[서효인의 ‘소설처럼’] 이야기는 그릇이다 -박서련 외 ‘바리는 로봇이다’
2023년 02월 23일(목) 00:30 가가
옛이야기는 옛이야기 특유의 답답함과 고루함이 있다. 콩쥐팥쥐전과 신데렐라, 백설공주 이야기는 놀랍게도 ‘계모’의 악행이 갈등의 뿌리라는 데에서 구체적인 공통점을 보이는데, 이는 가족 관계가 다양하고 복잡한 지금에 와서는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는 이야기가 틀림없다. 바리데기 설화나 심청전은 또 어떠한가. 옛이야기에서 약자는 쉽게 버림받았고, 그 운명을 공동체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현재의 관점으로 옛이야기는 대체로 아동 학대, 성차별, 약자 혐오 등의 혐의가 짙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인류의 원형을 제 안에 간직한 채 입에서 입으로, 글과 책으로 전승된다.
박서련 외 여덟 명의 작가가 참여한 소설 앤솔러지 ‘바리는 로봇이다’는 옛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지고 또 어떻게 변하는지 두루 살필 수 있는 기획이다. 책에 참여한 작가들은 실험실의 성실한 연구자처럼 각자의 프로젝트에 열중했다. 그중 표제작 ‘바리는 로봇이다’(박서련 작)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설화 바리데기는 딸만 일곱을 낳은 왕이 일곱 번째 딸을 버리면서 시작된다. 버림받은 바리의 귀환과 모험, 그리고 생존을 박서련 작가는 SF적 상상력으로 뒤집는다. 바리는 로봇이고, 로봇은 로봇을 주문한 인간의 변심으로 버려지지만, 다시 그 인간을 찾아온다. 바리가 (부모라 할 수 있는) 인간에게 돌아온 이유는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다. 옛이야기의 바리는 신으로서 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으나, 새로 태어난 바리는 로봇으로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일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고 해도, 불가능이 불가능한 만큼이나 가능도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마치 이야기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며 변하고 또 유지되듯이.
조예은의 ‘탑 안의 여자들’은 그림 형제의 동화 ‘라푼젤’을 다시 쓴 작품이다. 원작에서 라푼젤은 마녀에 의해 탑에 갇히고 왕자를 기다리는 입장이지만 조예은의 작품에서 라푼젤은 마녀에게 구원자가 된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캐릭터인 라푼젤을 현시대에 맞게 주체적으로 바꾼 디즈니의 전략에서 더 나아가, 소설은 인물의 관계마저 전복시킨다. 원작에서 소녀 라푼젤의 적은 같은 여자인 마녀였고, 마녀의 저주는 왕자를 만나야만 풀린다. 소녀는 결국 왕자에 의해 행복한 삶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행복을 방해하는 이는 마녀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어디서 많은 본 설정. 반면 ‘탑 안의 여자들’의 여자 둘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처지를 가엾게 여기며 거기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찾는다. 그 연대는 늙고 병든 이를 업은 채 높은 탑의 나선형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는 일만큼 지난하겠지만, 멈출 수는 없는 일이리라.
배예람 작가의 ‘헨젤과 그레텔의 거처’는 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의 문제를 다룬다. 동화 속 헨젤과 그레텔은 부모에게 버림받아 헤메다 숲속의 과자집을 발견하지만, 배예람의 작품에서 오누이는 부동산 시장의 광풍에서 버림받아 임시 거처를 찾는다. 둘에게 집은 그저 당장 몸을 누일 수 있는 자그마한 보금자리였는데, 세상은 집을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여긴다. 그러한 세상에서 쫓겨난 청춘에게 과자집은 그야말로 낙원이었다. 최신의 것이지만 절제된 단정함이 느껴지는 인테리어에 먹고 마실 것은 무한정 제공되었으며 집이라면 응당 해야 할 청소나 설거지도 오누이에게 요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그레텔은 집 어딘가에서 들리는 수상한 소리를 듣는다. “분명…… 했는데” 그 소리의 정체는 또 다른 청년들이었다. 헨젤과 그레텔이 그랬던 것처럼 거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또 어떤 사연으로 과자집에 온 것일까? 둘은 과자집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시간을 거슬러 현시대에 당도한 옛날이야기는 그 나름의 이유가 분명히 있다. 이야기라는 원형은 우리의 삶을 담는 거대한 그릇이 된다. ‘바리는 로봇이다’는 옛이야기의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 거기에 지금 여기에 필요한 인물과 서사, 감각과 인식으로 새롭게 구워진 단단한 그릇이다. 그 그릇에 담긴 이야기는 각기 다른 맛을 낸다. 그 맛이 무엇이든, 이야기는 각자의 모습으로 지속될 것이다. 시대를 반영하고, 인간을 투영하며. <시인>
시간을 거슬러 현시대에 당도한 옛날이야기는 그 나름의 이유가 분명히 있다. 이야기라는 원형은 우리의 삶을 담는 거대한 그릇이 된다. ‘바리는 로봇이다’는 옛이야기의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 거기에 지금 여기에 필요한 인물과 서사, 감각과 인식으로 새롭게 구워진 단단한 그릇이다. 그 그릇에 담긴 이야기는 각기 다른 맛을 낸다. 그 맛이 무엇이든, 이야기는 각자의 모습으로 지속될 것이다. 시대를 반영하고, 인간을 투영하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