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견(符堅, 338-385)은 5호16국의 하나인 전진(前秦)의 3대 황제로 왕맹의 보좌에 힘입어 북중국을 평정했다. 동진 정권을 무너트려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남하했다가 비수대전에서 대패한 후 살해된 비운의 군주다.

그는 전진의 창업주 부건의 조카로 자는 영소다. 어려서부터 박학다재하여 제왕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부건이 죽자 2대 황제 부생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했다. 칭호를 대진천왕으로 연호를 영흥으로 바꾸었다. 장안에서 즉위한 후 저족 세력을 누르고 한인을 포함해 다양한 인재를 발탁해 국력신장을 도모했다.

한족인 왕맹을 만난 것이야말로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산동성 창동현 출신의 왕맹은 보기드문 인재였다. 첫만남에서 마치 평생의 벗같은 우의를 느낄 수 있었다. “유비가 공명을 만난 것 같다”는 것이 왕맹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왕맹을 중서시랑으로 발탁해 내정개혁을 보좌토록 했다.

그는 왕맹을 중서령, 경조윤으로 승진시켰다. 왕맹은 개혁 성향의 중승, 등강 등과 협심해 장안의 질서를 회복하는데 노력했다. 태학을 정비, 학문을 장려하고 농경을 활발히 일으켰다. 수리시설의 보완, 군정의 개선 등도 착실히 이루어졌다. 370년 전연을 공격해 낙양에서 이기고 업을 공략해 멸망시키고 선비족 4만호를 장안으로 이주시켜 국력을 강화하였다. 전량을 멸하여 감숙 지방을 장악하고 내몽골 남부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372년 승려 순도를 시켜 고구려에 불경과 불상을 보내 불교를 전파했다.

그는 민생을 깊이 걱정한 군주였다. 어느해 크게 가뭄이 들자,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음악을 철폐했다. 왕후 이하 비단 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지방 관리들에게 지시해 효도, 공손, 청렴, 정직, 문학에 정통한 인재를 천거토록 했다. 천거된 자를 살펴 적임자일 경우 천거한 사람에게 상을 내리고 적임자가 아닐 경우 죄로 다스렸다. 이에 사회기강이 바로잡혔다.

전진과 전연은 북중국을 다스리는 가장 강력한 두 나라였다. 북중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전연을 평정해야 했다. 왕맹의 건의에 따라 낙양과 형양을 차지한 후 수도 업으로 진격하는 작전을 채택했다. 결국 전연은 멸망했다. 연의 오왕인 모용수가 투항하려하자 왕맹은 반대했다. “모용수 부자는 비유하면 용과 범 같아서 길들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일찍 제거하는 것이 낫다”고 건의했으나 부견은 그들을 받아들였다. 후일 그는 비수대전에서 패한 후 모용수 등이 등을 돌려 요장에게 살해되었다. 왕맹의 선견지명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375년 왕맹이 죽었다. 온 몸을 다해 국사에 전념했다가 병을 얻은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렸다. “동진이 비록 강남의 후미진 곳에 있으나 정통성을 갖고 있고 상하가 안정되고 화합한다. 신이 죽은 뒤에 원컨대 동진을 도모하지 마라. 선비족과 강국은 우리의 원수다. 끝까지 우환이 될 것이다.” 부견은 “하늘은 내가 천하를 하나로 평정하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인가. 어찌 빨리 빼앗아가는가”고 한탄했다.

그는 왕맹의 유지를 어기고 대군을 동원해 383년 동진을 공격했다. “남정하여 천하를 통일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383년 8월 보병 60만명과 기병 27만명을 이끌고 장안을 출발했다. 동진군은 재상 사안의 조카인 사현과 황충이 지휘했다. 전진군의 좌충수로 천하의 결전이라는 비수대전은 동진의 승리로 끝났다. 부견의 남정은 승려 도안, 부융 등의 반대에 부딪쳤다. 태자 부선도 간했으나 “천하의 대사를 풋내기가 어찌 알것이냐”고 일소에 부쳤다. 장안으로 도망쳐 온 그에게 선비족 모용부의 반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안에서 쫓겨난 후 오장산으로 도망갔다. 강족의 요장이 오장산을 포위하고 전국의 옥새를 요구했다. 그는 “감히 천자에게 강요하다니. 옥새는 이미 동진으로 보냈다. 줄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그는 신평현의 절에서 목졸려 죽었다. 향년 48세였다. 선명후암(先明後暗). 처음에는 밝았으나 나중에는 어리석게 됐다는 뜻이다. 그의 치세는 왕맹의 보좌로 처음에는 화려했지만 말로는 지극히 비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