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다는 소문이 들렸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지리산 자락 아래 산동에는 샛 노오란 봄이 흐드러지게 널려 있다. 봄을 제일 먼저 알리는 꽃은 매화로 알려져 있다. 진한 향을 멀리까지 날려보내며 만개하는 화려한 매화는 시각과 후각을 한꺼번에 만족시키는 첫 봄 꽃이다. 하지만 매화보다 앞서 미리 봄을 전하는 나무가 산수유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산수유는 2월말이면 이미 노란 꽃꼭지를 나무줄기에 매달고, 3월이면 노란 물감을 엎지른 듯 산동면 마을 전체를 화사하게 물들인다. 올 산수유 꽃은 열흘정도 빨리 피었다. 지리산 자락인 구례군 산동면 산동마을. 이곳은 산수유 동네로 유명하다. ‘산동’이란 지명은 중국 산동성의 처녀가 지리산으로 시집오면서 산수유나무를 가져다 심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수유꽃은 꽃 한송이를 놓고 볼 때 개나리에 비해 노란빛깔의 선명함에서 다소 떨어지지만 무더기로 피어나 군락을 이루고 있는 자태는 그 어느 꽃무리보다 아름다움을 뽐낸다. 전국 산수유 생산량의 절반 이상이 산동면에서 나오고 위안리 상위·하위 마을은 그 중심 거점이다. 산수유의 조상목이 있다는 현천마을. 1천년전 중국 산동에서 이곳으로 넘어와 심어진 최초의 나무다. 그 조상목이 꽃꼭지를 터뜨려서 인지 노란꽃들이 여기저기서 화려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지리산온천에서 상위마을 가는 계곡과 돌담 사이에서 노란꽃들이 반긴다. 아직 만개하지는 않았다. 보리밭위 돌담을 타고 피어난 산수유 무리들이 봄마중을 나온 아이들에게 겨우내 담아두었던 얘기 꽃을 피운다. 꽃마중 나온 젊은 연인들에게는 봄 기운 처럼 새로운 사랑의 밀어를 속삭인다. 두손 꼬옥 잡고 노오란 산수유 꽃을 감상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지난 세월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보리밭과 돌담, 산수유와 어린이들이 만들어낸 봄날의 정경은 쉬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한다. 언제 모여들었는지 산수유 정경을 뒤로 하고 서는 이들은 모두 이봄의 주인공이 된다. 상위마을은 이름 그대로 산 위쪽 마을이어서 아랫녘보다 개화가 더딘데 올 해는 이미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지리산 노고단과 만복대 아래 위치한 산동면은 아름답지만 우리 현대사의 아픈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여순사건때 백부전이라는 열아홉살 처녀가 토벌대의 오랏줄에 묶여 끌려가며 불렀다는 ‘산동애가’가 그 아픔을 노래한다. ‘잘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 따다 설운 정을 맺어놓고…’ 이 노래로 인해 박남준 시인은 산수유를 ‘어딘지 모르게 애처롭고 처연한 노란빛의 꽃’이라고 했을까? 산수유 꽃은 수줍은 꽃이다. 절대로 누구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지 않는다. 다만 무리로 피어 한 며칠 노랗게 울때면 그 꽃꼭지 아래서 행복하게 봄의 정령을 온 가슴으로 맞을 수 있게 한다. 화려하지 않기에, 샛노란 개나리의 경망스러움이 아니기에, 당신이라면 그 꽃꼭지 아래서 다시 이자리에 못 올지 모를 한 세월을 토막내어 충분히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해마다 3월말이나 열리던 산수유축제(15∼18일)도 예년보다 2주일이나 앞당겼다. 마을 민박은 두 달전 이미 예약이 동이 났다. 이번 주말께 산수유는 그 처연한 노란 가슴을 활짝 열어 젖힐 듯하다. /구례=최재호기자 lion@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