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선의 좌석은 그 열차의 마지막 칸에 있었으므로 진눈깨비가 나부끼는 승강장을 이십여 미터나 걸어들어가야 했다. 선로를 둘러싼 담장 위로 잿빛 빌딩들의 윤곽이 젖은 휴지처럼 풀어져 있었고, 차창으로 들여다보이는 객실들의 내부는 한산했다.

영선은 혼자였다. 그녀의 작고 마른 몸집은 양손에 들린 두 개의 묵직한 가방들 사이에 간신히 끼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화장기가 없는 그녀의 얼굴은 파랗게 얼어 있었고, 입가와 뺨에 버짐이 피어 있었다. 그녀는 두툼한 외투를 여며 입고 있었으나, 잘 손질하지 않은 채 묶은 긴 머리털과 삼십년동안 단 한번도 활짝 펴본 적이 없는 구부정한 어깨는 그녀를 볼품없이 춥고 가난해 보이게 했다. 무거운 안경알 아래 침울하게 빛나는 눈빛과 단단한 입모양만이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발차 시간이 가까웠다. 비좁은 층계에 몸을 싣고 남은 한 발을 승강장에서 떼어냈을 때 영선의 내부를 찢고 뛰쳐나온 것은 불분명한 쾌감이었다. 그곳은 그녀가 밟은 서울의 마지막 땅이 될 것이었다.

객실에 들어선 영선은 한쪽 가방을 통로에 내려놓고는 커다란 가방을 안아 키가 닿지 않는 선반 위로 힘껏 던져올렸다. 내려놓았던 가방은 먼저 것보다 무거웠으므로 이를 악물고 밀어올렸다. 경직되어 있던 몸을 좌석 등받이에 허물어뜨렸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열차가 큰 폭으로 흔들렸다. 차창 밖의 승강장이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차츰 속력이 붙은 열차가 한강으로 들어설 때까지 영선은 출발을 위한 그 최초의 금속성 음향과 진동을 찬찬히 곱씹고 있었다. 그것들은 영선의 의식 속에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회한들을 일으켜 놓았다. 철교를 건너는 기차 바퀴소리가 잿빛 강 위로 각인되고 있었다. 진눈깨비는 아파트촌과 도로들 위로 흩날렸으며, 난방장치가 가동되기 시작한 습한 공기는 역한 데가 있었다.

영선은 그녀가 두고 온 눅눅하고 그늘진 월세방을 떠올렸다. 다섯 해 남짓 살아온 방이지만 얼마 안되는 세간을 들어내고 나자 그렇게 생경해 보일 수가 없었다. 비키니 옷장이 놓였던 자리에는 켜켜이 뭉쳐진 먼지 덩어리들이 굴러다녔다. 헌책방에 처분하느라고 책을 내놓은 자리에는 토막난 노끈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도배하다시피 붙여 놓았던 풍경 사진들을 떼어낸 벽지의 보풀과 곰팡이들을 영선은 보았다. 마치 지나간 서울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거기 난자되어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을 떨치며 그녀는 방바닥을 쓸어냈다. 책상마저 처분하여 이젠 살림살이랄 것도 없는 짐들을 챙겨들고 월세방을 빠져나오자 점심 때가 되어 있었다. 역전 국밥집에서 뜨거운 해장국을 시켜 먹으면서 영선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눈앞에 음식이 있었고 그것을 삼켜야 할 뿐이었다. 마치 날마다 짐을 꾸리고 서울을 떠났던 사람처럼 그녀는 묵묵히 숟가락질을 하였다.



영선은 보얗게 김이 서려 있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순간 빌딩숲 위로 그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짧은 한숨을 토했다. 목마른 눈길로 봉우리가 있는 곳을 어림하였다. 가장자리가 푸르스름한 그 산은 꿈을 자주 꾸는 편이 아닌 영선에게 이상하리만큼 집요하게 일관되는 환상이었다.

꿈은 늘 비슷했다. 영선은 슬레이트 집들이 밀집된 산기슭을 헤매었다. 그녀가 가려고 하는 곳은 푸른 봉우리이다. 비구름이 뭉친 그곳은 깎아지르게 높지만 그녀에게 문제되는 것은 고도가 아니다. 다만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시야가 흐릿하다. 목이 마르다. 위쪽으로 오르기만 하면 될 터이나 미로처럼 얽힌 골목은 한결같이 막다른 길로 이어진다. 사위는 고요하다. 소떼를 몰고 가는 노인, 더러운 옷가지를 걸친 소년들이 벽 사이를 흐르듯 걷다가 사라진다. 문이 없는 집들이다. 더이상 목마름을 견디지 못해 벽을 두드리며 외치면 낯설고 목쉰 그녀의 목소리만 되돌아온다. 푸른 산에는 비가 내린다. 검푸른 꼭대기를 향해 고개를 꺾은 채, 그녀는 그 미로 속에서 옴쭉달싹도 하지 못한다. 불타는 목줄기를 움켜쥔다. 날아갈 수도 없다…… 그러다가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었다.

때로 꿈속이 아닌 생시에서도 영선은 그 산을 보았다. 서울이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인지라 어디서건 북한산과 관악산 줄기를 볼 수 있었는데, 그 윤곽선 위로 우뚝 솟은 그 산이 서울을 굽어보고 있을 때가 있었다. 방금 시야에 잡힌 차창 밖의 산은 운무에 가려 꼭대기가 잘 보이지 않았으나, 청남빛 산허리와 계곡의 짙은 그늘은 낯익은 것이었다. 영선은 차창이 뚫어져라 응시하던 목마른 눈길을 거두었다.

통증 때문에 더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눈을 감자 통증은 조용히 춤추다가 눈 밖으로 흘러 나갔다. 눈물을 닦아내고 눈을 가늘게 떴을 때 산은 사라지고 없었다.

원인이 불분명한 이 부정기적인 통증은 영선이 첫 직장에 다니던 무렵에 시작되었다. 오래 참다가 직장 근처의 안과를 찾았을 때 삼십대 초반의 의사는 무감동하게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보았었다.

“그럼 쉬십시오. 그 외에 정확한 이유는 없습니다.”

책을 보아야 하는 직업이라고 영선이 말했을 때 의사는 잘라 대답했다. 의사의 가운과,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두 간호사의 캡과 원피스의 흰 빛에 눈이 시리어 그녀의 눈에서는 아까부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밝은 빛을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부터 안구가 무엇인가에 찔리는 듯한 감촉을 느꼈다. 새벽에 눈을 뜨면 눈물이 함께 고였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자면 떠오르는 아침 햇볕에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증세가 심해지자, 밤이 되어 전등을 꺼도 남은 빛 때문에 눈이 시렸으며, 커튼을 치고 누우면 그 올올의 사이로 골목 가로등빛의 미세한 입자들마저 생생하게 새어들어와 영선의 감은 눈을 할퀴었다. 수건을 여러 겹으로 접어 얼굴을 덮고 누워 밤새 몸부림친 다음날, 영선은 사직서를 냈다. 복음서를 내는, 영선을 포함하여 사장까지 넷이서 근무하던 영세 출판사였다. 야근과 일요일 근무가 빈번하고 월급은 방세와 생활비에도 빠듯하던 곳이었으나 첫직장이었기에 잃고 싶지 않았다. 야간대학 국문과 졸업장이 학력의 전부인 그녀로서 그보다 나은 직장을 구하게 될 리도 만무했고, 무엇보다 자신만의 커다란 책상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충만해졌던 근무 첫날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책상 앞에 앉아, 흰 교정지에 여백이 할퀴어대는 흠뻑 젖은 눈자위를 연신 닦아내며 버틴다는 것은 그녀의 인내력 밖일 뿐 아니라 회사에서도 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무실에 놓고 쓰던 칫솔이며 찻잔, 재교와 삼교까지 혼자 보아 문장들을 거의 외고 있는 복음서들을 싸들고 “몸조리 잘하라”는 동료들의 말에 목례로 답했다. 눈의 통증 때문에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정신없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시장통에 자리한 후락한 건물 현관을 걸어나와 버스를 타고 월세방이 있는 종점까지 눈을 감고 돌아가며, 영선은 또렷하고 완전한 절망감을 만졌다.

“계속해서 눈을 혹사하면 시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의사는 그때 ‘시력’이라는 말을 발음하며 눈을 부릅떴었다. 마치 자신의 건강한 안구를 열어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부라리는 그의 눈자위에는 어떤 사적인 감정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진찰실의 유리문을 밀고 나와 희게 회칠한 병원벽을 두 손으로 짚으며 그녀는 짧게 절망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증세가 악화되지 않았을 때였고, 그저 매우 자극적인 절망감이었다. 때가되면 육신의 아픔만이 가르쳐줄 수 있는 그 무력한 안도감은, 자신이 전능하지 않아도 된다는, 보잘것없이 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일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영선은 방문과 창을 참그고 커튼을 내린 뒤 담요와 이불을 뒤집어썼다. 끼니를 때우는 일을 제외하고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잠을 잤다. 비몽사몽간에, 영선은 이대로 다시는 빛을 볼 수 없게 되는 건가, 이대로 영영 눈을 감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의식이 또렷이 들면 베갯잇에 머리털을 비비며 이를 악물었다. 아직도 포기할 수 없는 게 너무 많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가보지 못한 장소들의 지명이, 읽지 못한 책들이, 낯모르는 얼굴들이 비명을 지르며 어둠속을 떠돌았다. 그것들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가량이 지나자 차츰 통증이 가시었다. 충분한 휴식이 그녀에게 실눈으로나마 빛과 풍경을 식별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에도 나갈 수 있을 만큼 증세가 호전되었을 무렵이었다. 영선이 장봐온 비닐 꾸러미를 내려놓고 열쇠로 방문을 열려는 찰라, 그동안 밑반찬을 갖다주며 하루 한 번씩은 들여다보아 주던 주인집 아주머니가 전보 한 장을 건네었다. 영선은 깨알 같은 활자를 간신히 읽어냈다. 어머니의 부음이었다. 영선이 그토록 살기를 갈망했던 바로 그때, 어머니는 당신의 막내딸과 세상을 함께 등진 것이었다.

그때도 이렇게 열차를 탔었다고 영선은 기억했다. 형광 불빛이 주는 통증때문인지 어머니의 죽음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한없이 뺨을 흐르는 대로 버려둔 채, 오래고 오랜 세월 같은 밤기차를 탔었다. 영선은 그 새벽 동네 개들이 일제히 덤벼들 듯 짖어대던 소리와, 아침 짓는 연기와 함께 아직까지 마당에 가득하던 한약 달이던 냄새만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솜으로 코를 틀어막은 어머니의 쪼글쪼글한 얼굴도, 아이고 아이고 마른 소리로 울어대며 영선의 어깨를 억세게 움켜잡던 손위 언니, 오빠들의 얼굴도 눈물과 통증 속에 뒤엉켜 있었다. 모든 것이 뿌옇고 시리기만 했다.



열차가 영등포역에 닿았을 때 진눈깨비는 성근 빗방울로 바뀌어 있었다. 승강장에 무리져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오랜 기다림의 흉터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영선이 보기에는 이 열차가 도착한 오후 두시까지의 기다림 이상의 것이었다. 그들의 배타적인 무표정은 열차가 멈추자 이를 악무는 얼굴로 바뀌었고, 내려놓았던 짐을 향해 허리를 구부리는 몸짓들은 조금의 부산함도 느낄 수 없는 황폐한 것이었다. 그 때 영선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객실 내부를 쳐다보고 있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군인이었다. 국방색 군복이 주는 익명의 느낌-인성(人性)이 파묻혀버리는-을 그녀는 좋아하지 않았다. 군인은 입꼬리를 추켜서 웃으며 똑바로 영선의 눈길을 되받고 있었는데, 그녀는 좋지 않은 예감에 머리를 흔들고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객실은 언제 그렇게 음울하게 비워져 있었나 싶을 만큼 시끄러워졌다. 그녀의 옆자리에도 인기척이 느껴졌다. 좋지 않던 예감대로 예의 군인이 표를 들고 양해를 구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서 있었다. 영선은 자신이 옆자리에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외투며 장갑들을 보았다. 헝클어진 세월을 쓸어모으듯 주섬주섬 그것들을 챙겨 옷걸이에 걸었다. 군인은 일병 계급장이 새겨진 모자를 벗어 영선의 외투 위에 걸어두고는 조심스럽게 상체를 앞당긴 채 몸을 좌석에 붙였다. 소지품이 없는 군인의 양손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자신의 넓적다리와 좌석 손잡이를 오가다가 짐짓 태연하게 손깍지를 쥐었다.

옆자리에 군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앉았다면 그녀는 말을 건네 볼 생각도 있었다. 오래 침묵했던 입술 밖으로, 관계 없는 사람들끼리만 느낄 수 있는 안도감 속에서 무슨 말이든 내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녁나절 같은 어두운 날씨였다. 차창에 비친 어슴푸레한 얼굴을 영선은 보았다. 완벽하게 무표정한 그것은 자신의 얼굴이었다. 서울이구나, 영선은 눈을 감았다. 서울에서 배운 얼굴이구나, 술이며 음료수, 마른 오징어 따위를 실은 판매대가 좌석 사이로 지나쳐 간 것을 기척으로 느끼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질벅거렸다.

군인의 손에는 주스 캔이 들려 있었고 무릎에는 삶은 달걀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사양하려는 몸짓을 지어보이기 전에 영선은 군인 특유의 막무가내의 눈빛과, 완강하게 그녀의 얼굴 쪽으로 쳐들려 있는 손등의 굵은 정맥을 확인하였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먹을 것이 아닌, 처음 보는 모르는 물건인 양 캔을 어루만지다가 창틀에 올려놓는 영선의 몸짓을 삼킬듯이 지켜보며 군인은 오래 준비한 듯한 말을 꺼냈다.

“……종착역까지예요.”

영선은 성의없게 말끝을 흐렸다. 캔을 가리키며 더욱 성의없게 고맙다고 말했다. 차창 밖으로는 새하얗게 질린 나뭇가지들이 철로변을 따라 곤두서 있었다. 열차의 속도 때문에 그것들은 마치 몸서리치는 흰 가시짐승들 같았다. 영선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계란 껍질을 까고 있는 불편하게 커다란 손을 보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군인은 눈을 빛냈다. 얼굴 근육을 모조리 펴는 것 같은 솔직한 웃음을 웃어 보였다. 장성(長城)이라고 그는 대답했다.

“휴가를 받은 모양이지요?”

생각 이상으로 말씨가 친절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영선은 이어 물었다.

“팔개월 만에 나오는 겁니다. 민간인하고 얘기해 보는 것도 팔개월 만입니다. 부대는 강원돕니다. 고속버스를 타고 오다가 멀미를 했습니다. 생전 멀미라곤 안하는 체질인데…나오자마자 먹은 자장면이며 소주며 휴게소에서 모조리 토하고 거기서부터 택시 타고 영등포로 왔습니다. 기차를 타면 멀미를 안할까 해서 표를 끊었습니다. 정말 인제 괜찮아졌습니다.”

군인은 단단히 군기가 잡힌 억양으로 다, 다, 다, 로 이어지는 문장들을 단숨에 지껄여버리고는 가쁜 숨을 골랐다.

“고향에 가시는 겁니까?”

영선은 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군인의 환희에 찬 눈빛과, 무언가 간절하게 할 말이 가득차 아직도 우물거리고 있는 입술을 지켜보다가 그만 미소지어버렸다.

“전 고향으로 갑니다. 귀향이란 말이 얼마나 좋을 수 있는지 모르실 겁니다.”

군인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귀향.

영선은 미소지었던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열네 살에 고향을 떠난 후 고향과 함께 맨 먼저 떠오르는 영상은 아버지의 무덤이었다. 동네에서 소문난 술꾼이던 그의 인상(印象)은 어린 그녀의 의식 밑바닥에 새겨진 낙인이었다.

오남매 중에 터울 많이 지는 막내딸인 영선은 그의 덕분에 두 번 출생신고가 되어 있었다. 딸 낳아 섭섭하다고 막걸리에 고주망태가 되어 냉큼 면사무소에 달려가 신고를 하고, 일주일 후에 그걸 기억 못하고는 다시 신고를 한 것이었다. 국민학교 취학 통지서가 두 통이 날아들었을 때에야 어머니가 그사실을 알았다. 첫번째 호적에 올린 이름은 정림이었는데, 별 수 없이 정림이를 사망신고했다.

아버지가 정림이를 사망신고하고 돌아온 저녁, 영선은 왜 그런지 모르게 슬펐다. 정림이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밝고 환한 이 지구 반대편 어디쯤에선가 정림이가 영선과 함께 자라고 있었을 것 같았다. 고운 옷을 입고, 텔레비전에나 나오는 부드러운 베개를 베고 꽃무늬 이불을 덮고 정림이가 살고 있었을 것 같았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늘씬 두들기거나 어머니가 악에 받쳐 울면서 냄비며 밥그릇을 던져댈 때에 영선은 일곱 살에 죽어버린 정림이가 한없이 가엾고 그리웠다. 그 좋은 집과 옷을 두고 어떻게 죽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어느새 정림이는 정말 살아 있던 여자아이가 되었고 그 아이를 죽이고 돌아온 것은 바로 아버지가 되어버렸다.

열두 살의 여름에 아버지가 술병으로 죽었다. 상여를 잡고 무섭도록 울어 대었으며 한동안은 일손을 놓고 사립문 어귀만 내다보고 있곤 하던 어머니는 흰 리번 핀을 뽑아내고 나자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어졌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뿐 아니라 웃지도 않았다. 영선은 그런 어머니가 낯설고 무서웠다.

해가 바뀌어 봄이 되었다. 모두들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가는데 영선은 집에 남았다. 봄 내내 염소 먹일 꼴만 베었다. 여름방학이 되어 친구들이 내려왔다. 영선은 왜 그런지 그 아이들과 마주치는 것이 싫었다. 그 아이들이 먼 발치에서 보이면 숨거나 먼 길로 돌아갔다.

<25일자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