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5월 14일 ‘양동시장’
2019년 09월 19일(목) 04:50 가가
“지도 인자 가게로 들어갈 수
있을께라우?”
“빚만 ?애면 가능하제
나도 그랬응께”
양동시장 상인들은
좌판상이나 리어카 행상을
있을께라우?”
“빚만 ?애면 가능하제
나도 그랬응께”
양동시장 상인들은
좌판상이나 리어카 행상을
비가 줄기차게 내리자, 명태가게 차양막이 한쪽으로 처지면서 물줄기가 쏟아졌다. 하마터면 마른 명태들이 물벼락을 맞을 뻔했다. 다행히 명태가 든 상자에는 빗물이 한두 방울만 튀었다. 육십대 초반의 김양애 씨는 명태상자를 안으로 들이면서 말했다.
“오메, 가물었는디 농사에는 약비겄네!”
명태가게 모서리에서 좌판을 편 순천댁이 일어나서 허리를 폈다.
“한 상자라도 폴아야 밥값이라도 헐틴디.”
“아따, 날씨 좋은 날 두 상자 폴믄 되지라우.”
“자네는 인자 쪼깐 살만 헌갑네잉. 여그 들어올 때는 다 죽어가드만.”
“지도 인자 가게로 들어갈 수 있을께라우?”
“빚만 ?애면 가능하제. 나도 그랬응께.”
“부녀회장님, 쉬시지라우. 지가 가게 봐줄께요.”
“그라믄 으디 잠시 댕겨올 디가 있응께 가게 쪼깐 봐주소.”
양동시장도 예외 없이 비오는 날은 손님이 찾지 않았다. 그런 날 상인들은 장사를 잠시 접고 이 가게 저 가게 옮겨 다니며 수다를 떨거나 물건정보를 교환했다. 광주천 하류를 따라 길게 늘어선 양동시장은 광주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상설 시장이었다. 거기가면 채소에서 생선, 의복, 살림살이 용품까지 뭐든지 다른 데보다 값싸게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살기 힘들 때 마지막으로 찾아와 날품팔이라도 하다가 재기하는 곳이 양동시장이었다. 처음에는 시장 어귀나 가게 모서리에서 좌판이나 리어카 행상을 하다가 형편이 나아지면 작은 가게를 세내어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런 과정을 거친 장사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양동시장 상인들은 좌판상이나 리어카 행상을 내치지 않고 한 식구로 여겼다.
“서울로 물건 띠러 간 일은 잘 됐냐?”
“얇은 긴 팔 옷 56만원어치 띠어 왔그만요.”
미리 유행을 예감하고 동대문시장에서 신상품을 도매가로 사왔다는 말이었다. 옷 장사는 감각이 남달리 앞서야 했다. 유행을 뒤쫓기만 하다가는 망했다. 그런데 병규 사촌누나 박수복은 양동시장에서 옷 장사로 7년을 버텼다. 병규 어머니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56만원은 양동시장에서 작은 가게를 하나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봄옷이 고로코름 많이 폴릴끄나?”
“두고 보씨요. ?어서 못 팔 것잉께.”
“니는 머리가 영리해서 절대로 손해는 안 보겄제.”
“올 봄에 겁나게 돈 한 번 벌어불라요.”
사십대로 보이는 박수복은 자신 있게 말했다. 병규 어머니는 조카인 박수복의 말을 늘 믿는 편이었다. 박수복은 장사하면서 기회를 잘 잡고 판단을 잘했다. 수복의 형제들 모두 머리가 총명했다. 그런데 수복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놔두고 이따금 다른 여자들을 불러들여 살림을 축낸 데다 화투놀음에 빠져 논밭을 야금야금 날려버렸기 때문에 6.25전쟁 후 고향인 나주 금천면을 떠나야 했다. 큰오빠는 나주 금천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로 나와 밤에 구두닦이를 하면서 낮에는 광주일고를 다녔다. 그러나 작은오빠는 중학교를 끝내 진학하지 못했다. 수복도 정규학교를 가지 못하고 공민학교로 가서 한글을 익혔다. 공민학교 방학 중의 일이었다. 수복은 옆집 아주머니의 쌍둥이 갓난아이를 보러 서울에 따라갔다가 내려와 양동에 있는 베 짜는 공장에 들어갔다. 열여덟 살까지 그곳에 다녔다. 그러다가 3천 명 규모의 큰 방직공장으로 옮겼다. 정식으로 응모해서 입사했다.
그곳에서는 처음으로 월급인상 데모를 해봤다. 또 한 번은 데모를 주동하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주동한 다섯 명이 박인천 사장 앞으로 불려갔다. 다른 사람은 운동화를 신고 갔는데 박수복은 슬리퍼를 끌고 갔다. 전무가 “왜 어른 앞에 오면서 쓰레빠 신고 왔냐!”고 다그쳤다. 그래서 “왜 쓰레빠 신고 작업하는 사람을 불렀습니까?” 하고 대꾸하자 박인천 사장이 “아이고, 자네 말이 맞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세.”라고 무마했다. 이에 박수복은 “네, 분명히 그러겄습니다. 근디 너무나 부당한 대우를 해주시면 안 되고, 적당한 선에서 해주씨요.”라고 말했다.
스물세 살 때 사진관에서 연애하던 남자와 결혼했는데 시어머니는 예단 없이 들어왔다고 날마다 구박을 했다. 설상가상, 남편은 서울로 가버렸고 박수복은 친정으로 가서 딸아이를 낳았다. 시댁에 돌아오니 시어머니는 또 구박을 시작했다. 다행히 남편이 서울에서 돈을 조금 벌어와 학동 다리 옆에 셋방을 얻어 분가했다. 그때부터 리어카를 하나 장만해서 장사를 시작했다. 얼마 후 둘째아이를 업고 당숙 집 골방으로 갔다. 둘째아이를 업고 광주공원에서 찐 고구마 장사를 했다. 이후에는 돈을 조금 모아 남도극장 앞에서 가구점을 했다. 그 다음에는 남편이 병을 앓자 튀김장사, 꽈배기 장사, 호떡 장사 등을 하며 남편병원비를 대며 살았다. 셋째아이를 배고 나서는 호떡장사 리어카는 시동생에게 주고 양동시장으로 들어왔다. 리어카 좌판에 칼, 허리띠, 귀걸이, 목걸이, 양말 등등 오만가지 잡화품을 놓고 팔았다. 그러다가 가게 하나 얻어 아동복 장사 7년을 했다.
“팔자 억쎈 니가 요로코름 사는 거 보믄 신통방통해야.”
“결혼한 지 3년 만에 짜잔헌 가시내 났다고 시어머니가 구박을 참말로 심허게 헙디다. 그래서 죽을라고 팔각정에 올라가서 딸을 요렇게 내려다보는디 못 죽겄습디다. 아래를 쳐다봉께 무섭기도 허고. ‘죽을 용기 있으면 살아야 쓰겄다’ 허고 도로 내려왔지라우.”
“잡초가 따로 ?어. 밟아도 밟아부러도 죽지 않는 잡초가 우리랑께.”
“양동시장이라도 ?었다믄 지는 진작 어처께 됐을지도 모르지라우.”
“근디 서울 가서 병규는 만나 봤냐?”
김양애 씨가 속마음으로 알고 싶은 것은 수복의 가게 형편보다는 올해 동국대학교에 입학한 작은아들 병규 소식이었다. 미국에 사는 큰딸이 학비를 대준다고 해서 병규가 고등학교 3학년 내내 모포 하나 가지고 독서실에 다니면서 공부해 동국대학교에 진학했던 것이다.
“시간이 ?어서 보지는 못했는디 서울은 큰일입디다.”
“뭔 일?”
“학생들이 데모를 허고 야단 났어라우. 줏대가 강헌 병규도 휘쓸리지 않을랑가 모르겄소.”
“아이고메,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다냐. 으째야쓰까?”
“시방 바로 전화해부씨요.”
“그래야겄네잉.”
김양애 씨는 종철 어머니가 술과 밥을 파는 서너 평짜리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전화를 빌려 쓰기 위해서였다. 김양애 씨가 전화를 걸자 바로 아들 병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규냐?”
“네, 엄니.”
“뭣허고 있냐?”
병규가 동국대학교도 휴교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자취방에서 책을 보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집에 한 번 댕겨갈래? 보고 ?아서 그란다.”
김양애 씨는 아들이 반발할까봐 데모란 말은 꺼내지 못했다.
“그라믄 엄니, 삼사 일 책 좀 보다가 19일 아침에 광주고속으로 내려갈게. 마중 나올라요?”
“아부지랑 나가마. 근디 으째서 납부금은 받음시롱 수업을 안 한다냐?”
“여그 서울은 시끄럽그만이라우. 전두환 땜시 대학생들이 5월 들어서 맨날 데모허고 있그만요.”
“그라냐? 오전 ? 씨쯤 내려올래?”
“내려가기 전날 전화하께요.”
박수복이 전한 말대로 서울은 대학생들이 날마다 시위를 하는 모양이었다. 김양애 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들이 ‘집에 한 번 댕겨가라’는 말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학을 다니는 아들을 둔 김양애 씨를 보고는 종철 어머니가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병규가 공부를 겁나게 잘해분 모냥이요잉.”
“지가 대학 갈라고 독서실 댕김시롱 무자게 애를 씁디다.”
“나는 대학 댕기는 자식을 둔 부모만 보믄 부러와라우.”
“아이고, 집이 자식은 마음씨가 착헌께 됐지, 또 뭘 바란다요.”
“학교 댕길 나이에 가구공장서 일허는 자식만 보믄 맴이 쓰리지라.”
종철 어머니의 남편은 무능력자였다. 사업한다며 식당에서 번 돈을 가져가곤 했지만 그때마다 실패했다. 없는 살림을 더욱 쪼들리게 했다. 학벌도 시원찮고 사업수완도 모자라서 무엇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종철 어머니가 집안 살림을 도맡아 이끌었다. 종철 어머니가 아파서 병원에라도 입원하게 되면 집안은 엉망이 됐다. 종철이 중학교 2학년 때 배수술을 하게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술 빚 때문에 가족들이 밥을 굶을 지경이었다. 결국 고등학교 2학년이던 종철이 형은 학교를 자퇴하고 장롱 만드는 공장에 들어가 기술을 익혔다. 월급을 받아 어머니 손에 쥐어주기 위해서였다. 종철이도 중학교를 가까스로 졸업한 뒤 형에 이어 유동의 가구공장에 들어가 자개로 문양을 새기는 기술을 배웠다. 공장에서 숙식하며 일했는데 공휴일에는 집에서 다녀가곤 했다.
“집이 아들을 보믄 맴이 참 착해라우. 부모 고상시키지 않을라고 학교도 그만두고 공장에 댕기는 것 아니요.”
“아이고 부녀회장님, 고 얘기는 고만 헙씨다. 맴이 아픈께.”
김양애 씨는 전화만 하고 식당에서 나왔다. 양동시장에서 장사하는 상인치고 가슴 아픈 사연이나 힘들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양애 씨의 과거도 익모초 즙보다 더 쓰디썼다.
‘남편 복이 나보다 ?는 여자가 으디 있을라고.’
남편은 마음만 좋았지 생활능력이 전혀 없었다. 남에게 풍수나 관상을 봐주고 겨우 담배 값이나 벌어 쓰는 사람이었다. 생활은 김양애 씨 몫이었다. 자식들은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했다. 큰딸과 큰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병규는 중학생이 돼서도 꽁보리밥을 먹었다. 막내 경순이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먹는 밥보다 조금이라도 쌀이 더 섞인 밥을 도시락으로 싸주었지만 반 친구들 사이에서 병규 도시락이 가장 새카만 꽁보리밥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병규가 학교에서 돌아와 투덜거렸다.
“엄니, 인자 도시락 안 싸가지고 댕길라요. 챙피해서 못 가지고 다니겄소.”
그러나 며칠 뒤 배가 고파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 꽁보리밥이라도 다시 싸달라고 했다. 김양애씨는 기가 막혔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래도 방 하나에 일곱 식구가 살아야 하는 곤궁한 형편이어서 흰 쌀밥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규는 비뚤어지지 않고 사춘기를 잘 넘겼다. 키도 대나무처럼 쑥쑥 자랐다. 198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서 복무중인 형을 면회하러 간 적이 있는데 부대원들이 형보다 훨씬 큰 병규를 보고 놀랄 정도였다. 대학은 엄두도 못 냈지만 이민 간 큰딸이 병규 학비를 대주어 서울로 가서 동국대학교에 입학했다. 김양애 씨는 중얼거렸다.
‘병규야, 이번에 내려오믄 엄니가 쌀밥에다 고깃국 해줄께.’
김양애 씨는 남원댁 생선가게 앞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남원떡, 점심은 했소?”
“인자 묵어야지라우.”
“찬밥이지만 짐치가닥에다 같이 묵을께라우?”
“부녀회장님 몬자 잡수씨요. 고물 줏으러 간 남편 지달렸다가 같이 묵을라요.”
남원댁 방귀례 씨의 형편도 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원에서 광주로 온 남편은 고물장사를 했고 큰아들은 세탁소에서 일하고 있으며 작은아들은 학교를 못 가고 아이스크림 통을 메고 다녔다. 그리고 두 딸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하나는 수녀가 됐고 또 하나는 여군에 자원입대했다.
남원댁은 말하고 나서는 꼭 성호를 그었다. 독실한 천주교신자였다. 남원댁이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은 마흔두 살 때였다. 3년간 병명도 모른 채 요한병원을 다녔는데 하루는 병원원장이 “당신 병은 예수를 믿으면 나을 것이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요한병원 뒤에 있는 임동성당을 다니면서 영세를 받았다. 방귀례 씨가 성당에 다니면서 처음에 한 일은 월산동이나 농성동 뒷산에 있는 갱생원에 가서 교우들과 함께 밥을 해주고 옷을 빨아주며 목욕을 시키는 봉사활동이었다. 나중에는 신부가 부탁하는 대로 의지할 데 없이 죽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시신을 염해주었다. 염은 교우들이 맡기를 기피하는 봉사활동 중 하나였다. 어느 새 염 봉사는 방귀례 씨 몫이 돼버렸다. 나자로 이천수 성당 주임신부는 염할 일이 생기면 방귀례 씨부터 전화로 찾았다.
가게로 돌아온 김양애 씨는 양재기를 가져와 찬밥과 김치를 넣고 참기름을 몇 방울 친 뒤 비볐다. 고소한 냄새가 나자 입에서 침이 돌았다. 젊은 순천댁을 불러 함께 숟가락을 들었다. 봄비는 여전히 차양을 거세게 두들기며 내렸다. 그래도 밥을 먹는 동안에는 가게 안이 안온하고 그윽했다. 생활은 팍팍하지만 밥을 나눠먹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