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계엄 대항’ 故 김영수 목사, 41년만에 5·18민주묘지 안장
2025년 03월 13일(목) 20:05 가가
수감·고문 후유증…1984년 숨져
지난해 뒤늦게 5·18유공자 인정
17일 안장 예식…동지들 곁으로
지난해 뒤늦게 5·18유공자 인정
17일 안장 예식…동지들 곁으로
전두환 신군부의 불법 비상계엄과 광주시민 학살에 맞서 싸우다 산화한 고(故) 김영수(1946~1984·사진) 목사가 41년만에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영면에 들게 됐다.
그동안 유공자신청을 해 피해 보상을 받기 보다는 명예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타지에 묻혀있었지만, 5·18민주화운동의 동지들이 쉬고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이장을 하게 된 것이다.
(사)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한국기독학생총연맹 등은 오는 17일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김영수 목사 41주기 국립5·18민주묘지 안장 예식’을 엄수한다.
김 목사는 5·18 이후인 1980년 6월 강화도 개척교회에서 활동하던 중 김의기 열사의 유인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등사해 기독교대한감리회 강화서지방 청년연합회 참석자들에게 배포하고 낭독했다.
이 때문에 김 목사는 계엄법 위반 등 혐의로 붙잡혀 안양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같은해 8월 수도군단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김 목사는 수감생활과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급성백혈병을 얻어 1984년 3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김 목사는 생전 학생운동과 야학, 민주화운동 등에 헌신했다.
1978년 서울 동대문교회 야학 ‘재건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해 미성년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 활동을 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증진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5·18 당시에는 군부대에 ‘양심선언서’를 내고 예비군훈련서를 반납하기도 했다. 양심선언서에는 ‘비상계엄이 철폐되고 광주사태의 책임을 지고 관계 군 지휘관과 군 통수권자가 물러나지 않는 이상 어떠한 훈련에도 응할 수 없다’는 등 내용이 담겼다.
김 목사는 지난 41년 동안 5·18민주묘지가 아닌 경기도 파주시 금촌에 묻혀 있었다. 2007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긴 했으나, 5·18민주유공자가 아니라 국립5·18민주묘지 안장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2023년 가족들이 ‘5·18 8차 피해보상’을 신청하면서 김 목사는 지난해 11월에야 뒤늦게 5·18민주유공자 자격을 인정받았다.
김 목사의 아내인 남영숙 목사는 “보상을 받는 순간 남편의 죽음이 헛된 일이 될 지 모른다는 걱정에 그동안 보상 신청을 하지 않았었다”며 “지난 2021년께부터 먼 땅에 외로이 남은 남편을 민주화운동 동지가 있는 광주로 옮겨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부당한 비상계엄에 맞서 싸웠던 김 목사는 묘 이장을 준비하는 사이 또다시 비상계엄이 터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았다. 이에 남 목사는 “40년이 넘도록 우리나라는 하나도 바뀌지 않은 모양이다”고 한숨을 쉬었다.
남 목사는 “늘 현장으로 달려가 저항정신을 펼쳐 왔던 남편이 살아서 이번 비상계엄을 마주했다면, 이번에도 어김없이 현장에서 목소리를 냈을 것”이라며 “남편의 삶과 저항 정신이 널리 알려져서 민주주의를 더욱 잘 지켜 나가는 시대가 찾아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그동안 유공자신청을 해 피해 보상을 받기 보다는 명예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타지에 묻혀있었지만, 5·18민주화운동의 동지들이 쉬고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이장을 하게 된 것이다.
김 목사는 5·18 이후인 1980년 6월 강화도 개척교회에서 활동하던 중 김의기 열사의 유인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등사해 기독교대한감리회 강화서지방 청년연합회 참석자들에게 배포하고 낭독했다.
1978년 서울 동대문교회 야학 ‘재건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해 미성년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 활동을 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증진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5·18 당시에는 군부대에 ‘양심선언서’를 내고 예비군훈련서를 반납하기도 했다. 양심선언서에는 ‘비상계엄이 철폐되고 광주사태의 책임을 지고 관계 군 지휘관과 군 통수권자가 물러나지 않는 이상 어떠한 훈련에도 응할 수 없다’는 등 내용이 담겼다.
김 목사는 지난 41년 동안 5·18민주묘지가 아닌 경기도 파주시 금촌에 묻혀 있었다. 2007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긴 했으나, 5·18민주유공자가 아니라 국립5·18민주묘지 안장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2023년 가족들이 ‘5·18 8차 피해보상’을 신청하면서 김 목사는 지난해 11월에야 뒤늦게 5·18민주유공자 자격을 인정받았다.
김 목사의 아내인 남영숙 목사는 “보상을 받는 순간 남편의 죽음이 헛된 일이 될 지 모른다는 걱정에 그동안 보상 신청을 하지 않았었다”며 “지난 2021년께부터 먼 땅에 외로이 남은 남편을 민주화운동 동지가 있는 광주로 옮겨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부당한 비상계엄에 맞서 싸웠던 김 목사는 묘 이장을 준비하는 사이 또다시 비상계엄이 터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았다. 이에 남 목사는 “40년이 넘도록 우리나라는 하나도 바뀌지 않은 모양이다”고 한숨을 쉬었다.
남 목사는 “늘 현장으로 달려가 저항정신을 펼쳐 왔던 남편이 살아서 이번 비상계엄을 마주했다면, 이번에도 어김없이 현장에서 목소리를 냈을 것”이라며 “남편의 삶과 저항 정신이 널리 알려져서 민주주의를 더욱 잘 지켜 나가는 시대가 찾아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