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가 있다. 물론 식물분류학에서 붙인 이름은 아니고, 일반에 통용되는 이름도 아니다. 나무 곁에서 나무를 소중히 여기며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붙인 이름이다. 식물학에서 부르는 나무 종류는 ‘왕버들’이고, 나무가 서 있는 곳은 대전 중촌동 아파트 단지 한 귀퉁이다. 나무에 ‘평화의 나무’라는 이름을 붙인 마을 사람들은 나무가 서 있는 주변의 옹색한 빈터를 ‘평화공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층 아파트가 늘어선 지금의 중촌동은 옛 대전감옥 자리다. 1917년 즈음에 일제는 감옥을 지으려 계획했는데 삼일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자, 더 많은 만세운동 참가자를 잡아 가두기 위해 서둘러 완공한 감옥이다. 그로부터 일제 강점기 동안 여운형·김창숙·박헌영 등 유명한 독립투사들이 이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일제 침략자들이 물러간 뒤 대전감옥은 ‘대전형무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전형무소에 참혹한 피바람이 불어닥친 건 한국전쟁 발발 직후였다. 그때까지 대전형무소에는 많은 좌익 인사들이 수감돼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급하게 피신해야 했던 형무소 측에서는 수감자들을 집단으로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국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밝혀진 사실이다. 1800명이 희생됐다고 하지만, 정확한 숫자는 물론이고 학살의 구체적인 내용도 아직은 알 수 없다.

이러한 학살의 피바람이 지나고 대전형무소는 이북에서 내려온 북한군에 의해 장악됐다. 우익 인사들이 수감되는 건 자연스런 순서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상륙작전으로 피난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 북한군은 수감 중인 우익 인사를 참혹하게 학살했다. 이때 목숨을 잃은 우익 인사는 1500명이나 된다고 한다. 역시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한국전쟁 때의 가장 참혹한 비극 가운데 하나인 대전형무소 학살의 흔적은 그러나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겨우 옛 형무소의 흔적인 망루와 우물이 문화재자료로 보존되고는 있지만, 고층 아파트 숲에 묻혀 그 존재감은 희미할 뿐이다.

물리적 자취는 모두 사라졌지만, 여전히 대전 지역에는 한국전쟁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전쟁 때 희생된 좌우익 인사의 후손과 관계자들이 이 지역에서 살림을 이어가는 상황이지만, 그들 사이의 화해는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 이를테면 한국전쟁 기념식조차 우익 인사 중심의 기념식과 좌익 인사 중심의 기념식을 따로따로 치르는 상황이라는 게 이 지역 사람들의 전언이다.

참혹한 역사의 상처가 채 씻어지지 않은 비극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마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여러 생각을 모았다. 지나간 아픔의 역사는 무조건 갈아엎는다고 치유되지 않는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오히려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치유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역사 탐험대’라는 이름으로 마을의 역사를 진지하게 찾고 이를 제대로 알리고자 했다. 전쟁의 자취는 모두 사라졌지만, 피로 물들었던 학살의 현장을 생생히 지켜보았던 한 그루의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중촌마을 아파트 단지 ‘한켠’에 홀로 선 ‘왕버들’이었다.

백 년쯤 된 왕버들은 9m 정도까지 자랐으며 나뭇가지를 사방으로 14m 정도 펼쳤다. 중심 줄기는 썩어 문드러지면서 두 갈래로 나누어졌지만 줄기가 잘 썩는 왕버들임을 감안하면, 비교적 건강한 편이다.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 단언할 수야 없지만, 일제 침략자들이 감옥을 짓고 감옥 주변의 연못가에 풍치수로 심었던 나무 가운데 한 그루임이 분명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한 그루의 나무야말로 학살의 참혹한 현장을 고스란히 목격한 유일한 생명체라고 생각했고, 이 나무를 ‘평화의 나무’라 이름했으며, 나무 앞에 사연을 담은 입간판을 세우기까지 했다. ‘나무에게 옛 상처를 묻고 그 상처의 진상을 드러내는 게 평화에 다가서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무에는 사람살이의 역사가 온전히 담긴다. 호국 보훈의 달, 현충일 아침에 톺아보는 한 그루의 나무에 담긴 우리의 아픈 역사다.

<나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