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으로 학교 운동장이 고요하다. 극심한 폭염보다 더 깊은 침묵이다. 학생들이 없는 학교는 그저 건물이고 평평한 땅일 뿐이다. 교정의 수목들은 처져 있고, 학교 텃밭도 지쳐서 끝물이다. 인적이 없는 복도는 길게만 느껴진다. 잠긴 교실에는 덩그렇게 놓인 실내화뿐이다. 반복된 경련으로 수차례 응급실에 실려 가고, 팔뚝을 그어 자해하고, 장기 결석으로 유예 직전에 놓인 학생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등교했으면 좋겠다. 학부모 앞에서 무릎을 꿇기도 하고, 추스를 수 없는 배신감으로 굵은 눈물을 흘렸던 선생님들도 2학기에는 출근길이 더 가벼워졌으면 좋겠다. 이런 소망을 담아 ‘수국’과 ‘책’ 몇 권을 준비했다.

광주일보에 실린 나무 칼럼니스트 고규홍의 ‘나무 생각’을 잘 챙겨본다. 소재는 수목, 풀, 꽃들이지만 인간을 돌아보게 하는 맛깔난 글이다. 그냥 지나쳤던 알지 못한 신비로움이 깃들어 있다.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식물이 우리에게 주는 생활의 지혜가 놀랍다. 한 달여 전에 읽은 ‘더불어 산다는 것’의 주인공은 ‘수국’이었다.

나는 꽃 중에서 수국을 가장 좋아한다. 이른 아침 옅은 안개를 배경으로 꽃 잔치를 벌이고 있는 풍성한 모습이 좋다. 가늘디가는 는개가 내린 날은 촉촉한 윤기로 편안함을 주는 꽃이다. 마련해 놓은 시골집을 온통 수국 천지로 만들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칼럼을 읽기 전까지는 수국을 좋아했을 뿐 수국꽃이 보여주는 경이로운 배려와 역할은 알지 못했다. 토양의 성분이 산성일 때는 청색, 알칼리성일 때는 자홍색으로 변한다는 정도였다. 내가 알고 있던 아름다운 꽃은 진짜 꽃이 아니었다. 진짜 꽃은 너무나 미미해서 벌과 나비를 부를 수 없기에, 화려한 가짜 꽃을 만들어 유인한다고 한다. 꽃가루받이가 끝나면 하늘로 향했던 가짜 꽃은 땅 쪽으로 뒤집어진단다. 벌에게 보내는 상황 종료의 신호란다. 수고롭게 다시 오지 말라는 배려의 모습이란다. 수국꽃이 떨어지지 않고 누리끼리할 때까지 오래 매달려 있는 것도 꽃이 아니라 꽃을 위한 특별한 조직이기 때문이었다.

교무실에서 수국 이야기를 했더니 놀라워했다. 생각보다 수국을 좋아하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교정에는 크고 화려한 개량종 수국과 소소한 산수국이 있다. 선생님 몇 분과 함께 수국에게 갔다. 가짜 꽃과 진짜 꽃을 확인하고 싶었다. 우리 학교 땅은 산성인지 엷은 청색이었다. 화려한 가짜 속에 점을 찍어 놓은 듯 꽃술처럼 보이는 진짜가 있었다. 갓 피어난 산수국은 하늘로 팔을 벌리고, 가루받이가 끝난 산수국은 일제히 땅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규홍 교수가 말한 ‘뒤집기 신공’을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가 이 미물의 변화에 감탄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느낀다는 말은 이런 것을 두고 이르렀으리라. 수국 화분 몇 개를 구해서 선생님들께 드리고 싶었다. 곁에 두고 보면서 힘든 학생들을 더 배려하지 않겠는가.

방학 중에 반복해서 읽은 책이 신경외과 의사 칼라니티가 쓴 ‘숨결이 바람 될 때’이다. 저자는 몇 년 동안 수백 명의 환자들에게 말기 진단이나 사망 진단을 내리고, 복잡한 수술에 대해 설명해 주고, 완치 환자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던 그 진찰실에서 어느 날 자신이 폐암 선고를 받는다. “내가 꿈꿔왔으며 곧 실현되려던 미래, 그리고 오랜 세월 부단히 노력하며 도달하려 했던 삶의 정점이 사라지고 말았다”며 탄식한다.

자신도 환자이기에 치료를 받으면서 다른 환자를 치료하는 신경외과 의사. 이 모순된 상황에서 불꽃같이 타오른 서른여섯의 짧은 생애가 간결한 문장에 담겨있다. 인생의 길이는 마음대로 정할 수 없지만 깊이와 폭은 바꿀 수 있다는 말이 떠오른 책이다. 초가 다 타고 마지막 심지가 스러지면서 불꽃을 거두는 것처럼 표현된 칼라니티의 죽음은 우리에게 건강한 몸과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절절하게 보여주었다. ‘O형 혈액처럼 누구에게나 생명의 피를 나누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책으로 모든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는 서평도 있었다.

이 책을 몇 권 주문했다. 학교 도서관과 학생과에 비치할 생각이다. 여러 사연으로 힘들게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학생이나, 녹록치 않은 교단에서 심신이 지친 선생님에게 꼭 한번 읽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