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전두환(88)이 11일 5·18 민주화운동 39년만에 광주 법정에 섰다.

역시나 사과의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전씨는 되레 5·18 당시 시민을 향한 발포 명령이나 헬기사격에 대해 부정하고, 재판 내내 거짓말만 늘어놨다. 자신에게 밀착 접근한 취재진에겐 “이거 왜 이래”라며 호통까지 쳤다.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담담이 재판을 지켜보자고 했던 광주시민들은 전씨의 뻔뻔하고 무례한 행동에 도망치듯 떠나는 그의 차량을 가로막고 거세게 항의했다.

그동안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고 주장해온 전씨는 11일 오전 승용차를 타고 서울 자택에서 광주지방법원으로 왔다.

예상보다 1시간여 빠른 낮 12시 34분께 광주지법에 도착한 전씨는 예상과는 달리 건강한 모습으로 차량에서 내렸다. 지난해 5월 불구속기소된 후 2차례의 재판연기 신청과 2차례의 공판기일 출석거부에 이어 사실상 5번째만에 재판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법원으로 향하던 전씨는 “발포 명령 부인하십니까”라는 취재진의 질문 과정에서 자신의 몸이 조금 밀리자 “왜 이래”라며 화난표정으로 고함을 지르는 등 정정한 모습이었다.

전씨의 첫 공판기일은 이날 오후 2시 30분 광주지법 201호 형사대법정에서 형사8단독 장동혁 부장판사 심리로 1시간 15분간 진행됐다.

아내 이순자씨는 신뢰관계인 자격으로 전씨와 나란히 앉았다. 전씨는 검찰에 이어 변호인의 모두 진술이 진행되자 졸다 깨기를 반복했다.

검찰은 전씨가 주도적으로 회고록에 허위 내용을 적시해 고(故)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지적했다.

검찰은 “12·12 반란과 5·18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뇌물 등 혐의로 무기징역이 확정됐던 전씨의 대법원 판결문에 ‘광주에서 시위를 강경 진압할 것을 지시했다’고 기록된 점, 국가기록원 자료 및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 조사 결과, 관련 수사 및 공판 기록, 참고인 진술 등을 조사해 군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확보했다”고 강조했다.

이에 전씨의 법률 대리인인 정주교 변호사는 “과거 국가 기관 기록과 검찰 조사를 토대로 회고록을 썼을 뿐 고의로 허위사실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면서 “5·18 헬기 사격설의 진실이 아직 확인된 것도 아니다”며 검찰의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정 변호사는 또 “조비오 신부가 주장한 5월 21일 오후 2시 전후 광주 불로교 상공에서의 헬기 사격 여부에 대한 증명이 충분하지 않다. 허위사실로 사자(死者)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은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법정에서 재판을 지켜보던 일부 방청객들은 헬기 사격설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변호인의 주장에 “전두환 살인마”라고 소리치는 등 분노하기도 했다.

정 변호사는 이날 재판부에 형사소송법 319조를 근거로 이 사건의 범죄지 관할을 광주라고 볼 수 없다며 재판 관할 이전의 판결을 선고해 달라고도 했다.

이순자씨는 재판부에 편지를 전달했다. 전씨 부부는 재판이 끝난 뒤 30분 넘게 청사 내부에서 대기하다가 광주시민의 비난과 항의를 받으며 승용차를 타고 법원을 떠났다.

5월 단체들은 재판 후 법원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전씨가 혹시 알츠하이머로 기억이 온전하지 못해 회고록을 잘못 쓴 것을 사과하지 않을까? 계엄군과 수사관의 무차별 폭력으로 아직도 부상에 시달리는 분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을까? 계엄군에 의해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지 않을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했던 게 사실”이라며 “그가 진심어린 사과를 할 때까지 성숙하고 냉철한 시민의식으로 준엄한 법의 심판을 지켜보겠다”고 밝혔다.

한편 전씨는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불구속기소 됐다. 다음 재판은 증거 정리를 위한 공판준비기일로 진행되며 오는 4월 8일 오후 2시에 열린다.

/박진표 기자 lucky@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