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사랑해♡♡”

탈북민 장순영(여·55)씨의 자기는 ‘대한민국’이다. 아픔 많고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긴 순영씨를 보듬어 준 곳은 대한민국이었다. 그는 “눈물 많고, 아픔 많았던 저를 받아준 곳이 이 곳이다. 대한민국이 나의 자기”라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기야 사랑인 걸 정말 몰랐니, 자기야 행복인 걸 이젠 알겠니”로 시작하는 ‘박주희의 자기야’를 신나게 불러제겼다.

대한민국 정착 14년째인 순영씨는 학습지(중국어) 교사, 요양보호사, 사회복지사 등 쉼없이 달려왔다. 이번엔 탈북민들이 세운 회사인 특장차 제조업체 ‘대한특장’에서 무역 실무에 도전한다. 중국에서 특장차 자재를 수입하는데 통역을 맡게 된 것이다.

순영씨는 1960년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1남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쟁 고아들을 중국에 보내 그 곳에서 주물·목형 기술을 익혀 다시 북한으로 데려오는 일을 맡은 기술자였다. 아버지 덕에 집안은 부유했고, 남부럽지 않았다. 그녀는 총명했다. 러시아어를 잘해 열네살에 평양외국어대학에 합격했다. 북한에서의 행복은 거기까지였다.

평양외대 입학을 위해 평양으로 떠나기 열흘 전 일이 터졌다. 아버지가 ‘반동’으로 몰려 어디론가 글려갔고, 가족은 시골로 추방됐다. ‘유물론을 신봉했다’는 이유였단다.

4남매의 맏이였던 순영씨는 하루아침에 가장이 됐다. 든든한 남편 덕분에 아무 일도 해본 적이 없는 엄마는 나약하기만 했다. 그녀의 엄마는 살아갈 길이 막막한 나머지 아이 넷을 데리고 장애인과 재혼했다. 엄마의 재혼과 함께 그녀의 불행은 시작됐다.

‘훗아버지’(새아버지의 북한말)는 폭력적이었다. 배급 받은 쌀로 자신은 밥을 배불리 먹으면서 아이들에겐 ‘곡산공장’에서 나오는 돼지사료를 가마솥에 쪄서 먹였다. 산에 가서 땔감을 해야 했고, 부뚜막 흙이 떨어지면 여린 손으로 손질해야 했다.

훗아버지는 그렇게 사악했다. ‘때려 죽여도 일없고, 굶겨 죽여도 일없는 반동의 자식’이라는 이유였다.

엄마가 재혼한 지 3년이 되던 해, 17살이 된 소녀에게 비참한 일이 또 생겼다. 훗아버지는 폭력을 휘두르다 못해 그녀를 성추행하기까지 했다.

13년을 훗아버지 밑에서 고통받다가 26세에 결혼을 했다. 건장한 사내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물바람은 그쳐지지 않았다. 훗아버지 못지 않게 폭력적인 남편을 만난 것이다. 결혼 3년 만에 광산에서 일하던 남편은 사고로 죽었다.

남편이 죽고 식량 배급마저 끊기면서 팍팍한 살림에 그대로 굶어 죽으리라 생각한 순명씨는 9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누워 있었다. 그런데 죽지 않았다. 이대로 굶어죽느니 쌀이 넘쳐난다는 중국으로 건너가 살길을 찾아보자고 결심했다. ‘반동의 자식’이라 탈북하다 걸리면 처형될 처지였지만, 한번 죽으리라 생각했던 목숨이라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양강도 혜산으로 나왔고 탈북했다.

돈이 없는 탈북은 쉽지 않았다. 1998년 7월 혜산역보다 한 정거장 앞인 위연역에서 몰래 기차를 탔다. 압록강 상류에 접어들자 달이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압록강을 한달음에 건너 중국 장백산으로 냅다 뛰었다. 장백산 수림에서 보름을 살았다. 인적은 없고 오로지 짐승소리 뿐이었다. 이러다간 짐승에 물려 죽겠구나 싶어 장백산을 내려왔다. 물어물어 친척집이 있는 중국 장춘으로 갔다. 친척의 도움으로 근처 식당에 일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중국말을 못한 탓에 수차례 해고됐다. ‘중국어를 할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겠구나’싶어 중국어를 배웠다. 함께 식당에서 일하는 중국 종업원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1년 중국말이 입에서 터졌다.

이후 중국어 탓에 삶은 한층 편해졌다. 활동영역이 넓어지다보니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그 중에는 남한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에게서 남한 얘기를 들었다. ‘자유가 있다’는 이야기가 귀에 쏙 들어왔다. 그리고 남한과 제일 가까운 산동성으로 옮겼다. 1년간 돈을 모아 남한행에 올랐다. 하지만 얼마 가지도 않아 중국 신장에서 배낭을 도둑맞았다. 거지가 돼 다시 산동으로 돌아왔다. 해군 출신 남자들과 배를 이용한 남한행도 도전했다. 또 실패했다. 위험이 너무 컸다. 그래서 안전한 길을 찾았다. 브로커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2002년 봄 중국 심양을 출발해 버마, 라오스, 태국을 차례로 거쳐 한국으로 들어왔다. 태국에서는 탈북 동료 40명이 한꺼번에 경찰에 붙들려갔다. 생일파티를 하는데 너무 시끄럽게 놀다가 이웃의 신고로 무더기로 붙잡힌 것이다. 어찌어찌 대사관과 연락이 돼 보석금을 주고 가까스로 풀려났다.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2004년 7월 마침내 인천의 하늘을 마주했다.

어렸을때 수재였던 순영씨는 배움에 목이 말랐다. 하지만 40대 초반에 하나원을 수료한 탓에 ‘탈북민 특례입학’은 불가능했다. 이듬해인 2005년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겸하면서 방송통신대학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했다. 중국에서 살면서 배웠던 중국어가 기초가 됐다. 학비와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로 벌어서 해결했다.

그녀의 열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교수가 중국어와 한자 실력이 뛰어난 그녀를 학습지 교사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5∼6년 동안 학습지 교사로 자리를 잡아가던 그녀는 ‘평생 직업’의 필요성을 깨닫고 순천제일대학 사회복지과에 다시 입학했다.

닥치는대로 배웠다. 그래서 딴 자격증이 10개에 달한다. 요양보호사·사회복지사·심리상담사·가정폭력상담사·대형운전면허 등. 지금은 한국어 교원 자격증과 중국어 번역가에 도전하고 있다.

순영씨는 최근 탈북민들이 모여 경기도 김포에 설립한 특장차 제조업체인 ‘대한특장’에서 일하기로 했다. 같은 처지의 탈북민들이 ‘대한민국에서의 성공 모델을 만들자’며 의기투합했다. 그녀의 임무는 중국어 통역이다.

순영씨는 4년전 야속했던 엄마를 한국으로 모셔왔다. 14살때 헤어진 친아빠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고향에 남은 형제들도 보고 싶다. 그년는 하루빨리 통일이 돼 온 가족을 ‘애마’(모닝)에 태우고 전국을 질주하고 싶단다.

/순천=김한영기자 young@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