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나 언덕을 넘어다니도록 길이 나 있는 곳을 고개라고 한다. 일의 중요한 고비, 혹은 중년 이후 열 단위만큼의 나이를 비유적으로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아! 지금까지 몇 개의 고개를 넘었는지…. 부산과 서울을 잇는 가장 크고 빠른 길이었던 영남대로가 문경에서 그만 백두대간을 만나 험악한 고개를 만들었다.

얼마나 험하면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다고 ‘문경새재’일까. 다들 어떤 사연을 안고 이 고개를 넘었을까. 걷기가 트렌드가 된 요즘, 옛사람들이 걸었던 이야기가 궁금해 경북 문경을 찾았다.

KBS 촬영장 내 아담한 한옥의 모습.

◇길 위의 역사를 만든 사람들

문경은 자체가 길 박물관이라고 했다. 문경새재도립공원에 도착해 ‘한국의 아름다운 길’ 표지판을 따라 올라가니 ‘옛길박물관’이 나온다. 박물관 입구에서 괴나리봇짐을 만났다. 먼길 떠날 때 보자기에 싸서 어깨에 메는 괴나리봇짐, 대체 뭐가 들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옛 선비들은 여행 지침서를 참고해 여행준비물을 챙겼다. 종이, 벼루, 먹, 옷, 이불, 비상음식으로 미숫가루와 꿀까지 넣었다. 그 지역을 여행한 사람이 작성한 유람록, 지도, 읽을 책도 빠뜨리지 않았다.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오늘날 여행자의 준비물과 거의 같다는 게 신기하다. 미니어처 북이라고 부를만한 앙증 맞은 ‘좁쌀책’이나 작은 팔도지도책이 그 옛날에도 있었다.

이번 문경 여행의 최대 소득은 조선 최고의 여행가 옥소 권섭(1671∼1759) 선생을 만난 일이었다. 선생은 조선팔도 이름난 명승지를 둘러보고 낱낱이 그 기록을 남겼다. 여행 중 즐거울 때면 언제나 일어나 다시 떠났으며, 그림 같은 주막과 샘물이 솟는 곳에서는 말을 세워 감상하면서 평생 여행길을 계속했다. 선생은 87세 때인 1757년 4월부터 다섯 달간 2000리를 돌아다니며 ‘원유기’를 남겼다. 선배님, 소리가 절로 나온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 ‘좋은 소식 듣기를 바라며’ 문경새재를 넘었다. 그중 몇 사람이나 과거에 급제해 금의환향했을까. 낙방자들은 절망 속에 돌아오며 그 쓰라린 심정을 글로 남기기도 했다.

‘지난해 새재에서 비를 만나 묵었더니/올해에는 새재에서 비를 만나 지나갔네/해마다 여름비, 해마다 과객 신세/필경엔 허망한 명성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유우잠(1575∼1635), 이분 결국 벼슬길에 나갈 뜻을 버리고 후진 교육에 힘쓰며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청운의 꿈을 품었던 선비부터 한 많은 민초까지 수 많은 사람들이 길 위의 역사를 만들었다. 입장료 무료. 054-550-8365.

도자기 전시관.

◇자연과 역사를 한곳에서 만나다

문경은 자연과 역사를 한곳에서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옛길박물관 맞은편에는 지난 2007년 개장한 문경새재 자연생태공원이 자리를 잡았다. 습생초지원, 생태습지, 생태연못, 야생화원 등을 테마로 자연생태를 집약적으로 조성해 놓았다. 문경새재 주변에서 많이 자라는 고로쇠나무, 조릿대, 금낭화도 이곳에서 만났다. 꽃사슴, 타조, 백봉 오골계, 호로조 등 동물도 꽤 많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다.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인 주흘관을 지나니 KBS 촬영장이 나타난다. KBS가 2000년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건립했다 허물고 2008년 조선시대 모습으로 만들었다. 7만㎡의 부지에 광화문, 경복궁, 동궁, 서운관, 양반집 등 130동의 세트 건물이 있다. 사극 ‘뿌리 깊은 나무’도 이곳에서 찍고 있단다.

세트라기에는 너무 정교해서 조선시대 거리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당이 넓은 양반집도 좋지만 초가집은 정겨워서 더 마음에 든다. 입장료 성인 1000원.

문경도자기전시관을 찾아갔다. 문경은 고려시대 청자부터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백자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900여 년간 도자기의 전통을 이어왔다. 어느 한 지역의 도자기 생산이 이처럼 장구한 세월동안 지속되어 온 사례는 발견하기 힘들단다. 고려청자 가마터 4개소, 분청사기 가마터 1개소, 백자 가마터 76개소 등 문경에는 모두 200여 곳에 가마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입장료 무료. 054-550-6416.

◇가장 위험한 길이 절경으로

고모산성까지는 차로 이동했다. 신라가 북진정책을 펼치면서 쌓은 고모산성은 조선시대부터 한국전쟁까지 시대별로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고모산성 입구에서 길 문화의 일부인 주막과 성황당을 만났다. 고모산성에 오르면 경북팔경 중에서 일경으로 꼽힌 진남교반이 내려다보인다. 진남교반은 진남교 다리를 중심으로 한 지역. 영남대로 옛길, 신작로, 국도, 철도, 고속도로가 모두 이곳을 지나고 있어 가히 ‘길 박물관’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곳 경치 한번 좋다.

오정산 중턱을 가로질러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을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파서 만든 구불구불한 길이 6∼7리에 걸쳐 나있다. 벼랑 부분에는 나무를 덧대어 힘들게 길을 만들었다. 여기를 어떻게 다녔을까 싶은데, 얼마나 다녔는지 토끼비리가 반질반질하다.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으로 진군할 때 이곳에 이르러 길이 없어졌다. 마침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는 것을 보고 따라가 길을 내게 되었다 해서 지명이 유래한단다.

문경에서 먹을거리로는 약돌 돼지가 유명하다. 문경에만 나는 약리 효과가 있는 화강암인 약돌(거정석)을 가루로 만들어 사료에 섞어 먹인 돼지를 말한다. 문경새재 KBS 촬영장 입구에는 문경 약돌 돼지집이 즐비하다.

/글·사진=부산일보·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