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차가워졌다. 겨울이 온 모양이다. 가을이 지나면 응당 겨울이 올 테지만, 막상 닥친 겨울은 갑작스럽기만 하다. 사는 것도 매한가지다. 태어나서 살다 죽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지만 ’장차의 일’은 항상 ’뜻밖’의 것으로 다가온다. ’나고(生), 살고(活), 죽는(死)’ 답 없는 문제의 답을 찾아 경북 성주를 다녀왔다. 사람 사는 고을 어디인들 태어나 살다 죽어간 사람들의 흔적이 없겠는가 마는, 경북 성주군처럼 생·활·사의 유적이 한곳에 집중된 곳은 드물었다.

**세종대왕자태실과 선석사

세종대왕은 왕비와 후궁에게서 모두 18명의 왕자를 얻었다. 형제들이 우애 있게 지내길 바랐던 세종은 전국 제일의 길지를 찾아 왕자들의 태를 한 곳에 묻었다.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태봉 정상이 바로 그 곳. 세종은 적서 17 왕자와 원손인 단종의 태를 이곳에 안장했다.
각각 화강암으로 만든 19기의 태실은 땅을 파 석실을 만들고 그 속에 분청사기로 만든 태호를 넣었다. 지상에는 기단석을 놓은 뒤 연꽃 무늬가 새겨진 중동석과 개첨석을 얹어 부도탑 모양으로 만들었다. 탑신이 낮고 넓어 균형 잡힌 조형미가 돋보인다.
태실이 자리 잡은 태봉은 작고 아담한 언덕이지만 명당 중 명당이다. 하지만 세종의 바람이나 풍수적 염원과 달리 왕자들의 우애는 지속되지 못했다. 둘째 아들(세조)이 선대왕이던 형님(문종)의 아들(단종)이자 조카를 축출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이른바 골육상쟁의 계유정란이 벌어졌던 것.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의 흔적은 태실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왕위에 오른 지 3년 째 되던 해(1457) 세조의 심복들이 동복 동생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배다른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의 태와 장태비 등을 산 아래로 파 던졌다. 1997년 성주군이 흩어진 기단석을 찾아 복원했다고 하지만 지상부의 개첨석 등은 여전히 찾지 못했다.
민심은 세조에게 있지 않았던 듯하다. 예조판서 홍윤성은 세조의 태가 이곳에 묻혀 있음을 알리고 비를 세웠는데 백성들이 비석을 돌로 찍고 갈아서 비석의 글자를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됐다.

**한개마을

한개 마을은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처음 정착한 이래 성산 이씨의 집성촌이 됐다. 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 형인데 낙동강의 지류인 백천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영취산이 등을 받치고 섰다. ‘한개’는 ‘큰 개울’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한개 마을은 조선 초부터 현재까지 560년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조선시대 양식을 대부분 보존한 한옥에는 대부분 사람이 아직 살고 있다. 이들은 아궁이에 장작을 떼 난방을 하고 밥도 한다. 한개마을에는 이런 고택이 9채나 있는데 그중 진사댁, 북비고택, 교리댁은 꼭 둘러볼 만하다.
’Y’자 형태의 마을길을 따라 왼쪽으로 접어들면 제일 먼저 다정한 초가집이 맞이한다. 300년 전 성산 이씨 정언공파 27세손 주진이 지은 집인데 비록 초가이지만 사랑채, 안채, 문간채를 갖춰 사대부가의 위엄을 잃지 않고 있다. 활짝 핀 국화를 소담스럽게 안고 있는 정원이며 무, 배추가 자라는 텃밭이 평화롭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민박(예약 054-930-6063)이 가능한 집이다.
마을 중간 쯤 위치한 교리댁은 영조 36년(1760)에 지어져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이다. 집보다는 마당에 있는 150년 된 ’탱자나무 같은 귤나무’가 더 유명하다. 제주에서 귤나무 3그루를 옮겨 심었는데 추운 날씨 때문에 탱자처럼 변했다고 한다.
한개 마을의 또 다른 멋은 옛 담장이다. 마을 담장의 주류인 토석담은 흙과 자연석을 번갈아 얹어 쌓았다. 비탈을 따라 구불구불 펼쳐진 전체 토담 길이가 무려 3천m가 넘는다. 집과 집을 잇는 낙엽 쌓인 옛 토담길, 꼭 한 번 걸어 보시라. 고풍스런 마을 속에 저절로 동화될 수 있다.

**성산동 고분굴

성산동 고분군해지기 직전 찾은 성산동 고분군에는 초겨울 햇볕이 따스하게 내려 앉아 있었다. 세종대왕자태실이 탄생의 숭고함이 권력투쟁으로 훼손된 장소였다면, 성산동 고분군은 죽어서 안온함을 찾은 장소였다.
세종대왕자태실과 한개 마을이 있는 월항면에서 성주읍 방면으로 방향을 잡아 달리다보면 나지막한 산등성이를 따라 볼록볼록 솟은 언덕이 줄지어 나타난다. 5분쯤 더 가다가 ’수비실 마을’ 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성산동 고분군을 만날 수 있다.
성산동 고분군은 동서로 낮게 펼쳐진 성산(해발 389m) 비탈을 따라 반달모양으로 분포해 있다. 현재까지 129기의 고분이 확인됐는데 성주지역 고분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성주 벌판을 한 눈에 내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점으로 봐서 이 지역이 삼국시대의 중심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고분들의 외형은 흙으로 원형의 봉분을 만든 토총이다. 무덤의 주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출토된 유물로 보건데, 성주읍 일대를 거점으로 삼았던 성산가야 수장층 고분으로 추정된다.
성산동 고분군의 매력은 누렇게 잘 익은 잔디를 따라 무덤들 사이로 산책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침 고분군 사이사이 오솔길에는 갈참나무 낙엽들이 적당이 쌓였다.
걷다보면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나 정겹다. 사람이 없는 사이 양지바른 곳을 찾아 멧돼지가 쉬어간 흔적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성주군 문화관광과 054-930-6064.
<부산일보 제공>
/글=박진국기자 gook72@busanilbo.com·사진=이상일기자 si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