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Annapurna, 8,091m)는 처음으로 인간에게 정상을 내어준 8,000m봉이다. 1950년 모리스 에르조그가 이끄는 프랑스대가 그 은밀한 기쁨을 맛봤다. ‘인류 최초의 8,000m’라는 의미에서 ‘Premier 8000m’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트레커들에게는 그 우아한 자태를 쉬 보여주지 않는다. 생추어리(Sanctuary)코스에서는 이 골 저 골 돌아설때마다 한 꺼풀씩만 보여준다. 그 것도 Ⅰ봉의 모습은 아니다. 형제·자매격인 남봉(7,219m)과 Ⅱ봉(7,937m)·Ⅲ봉(7,555m)·Ⅳ봉(7,525m)을 비롯 마차푸차레(6,997m), 강가푸르나(7,454m), 글레시어 돔(7,069m) 등 위성봉을 앞세운다. 병풍을 두른 듯한 본체의 속살은 베이스캠프에 가까이 다가서야 비로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안달해할 필요는 없다. 고도에 따라 달라지는 은백 설산의 파노라마는 평생 잊지못할 감동을 안겨준다. 그 뿐인가. ‘풍요의 여신’이라는 이름 뜻처럼 지천으로 피어난 풀꽃들과 다랑이논, 구룽족(Gurung)과 따망족(Tamang) 등 산간 부족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황량함으로 뼈속까지 절대고독을 스미게 하는 다른 히말라야 거봉들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촘롱(2,170m)∼시누와(Sinuwa)∼뱀부(Bamboo)∼도반(Dobhan:2,600m)=6시간 안나의 7∼8월은 갖가지 야생화들이 앞다퉈 꽃망울을 터뜨리는 시기다. 산길과 롯지(Lodge)에는 물봉선과 천남성, 석남화, 베고니아, 달맞이꽃, 엉컹퀴, 다알리아를 비롯 고사리와 난초류 등 다년생 풀과 잎 큰 나무들이 무성하다. 빙하 바로 아래 해발 4,200m까지 뿌리를 내린 들꽃들은 거칠기 짝이 없는 빙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푸른 이끼를 온 몸에 감은 나무들은 정글을 이뤄 그 품안에 원숭이들을 키운다. 낭떠러지에 생겨난 폭포들은 장쾌한 물줄기를 천 갈래 만 갈래 흩어놓는다. 이 곳이야말로 평생 늙지 않고 영원한 젊음을 누릴 수 있다는 꿈의 낙원, 샹그릴라(Sangri-la)가 아닐까. 모디 계곡을 거슬러 오르는 트레킹 루트는 곳곳에 형성된 돌계단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진다. 시누와부터는 우기 산행의 반갑지 않은 손님인 거머리의 습격에 주의해야 한다. 도반∼히말라야(Himalaya)∼데우랄리(Deurali)∼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4,130m)=7시간 히말라야의 밤은 별빛과 만년설 녹아내린 계곡물소리가 지배한다. 맑고 투명한 별무리 여울은 금방이라도 쏟아져내릴 것만 같다. 별들은 미동조차 금세 감지된다. 지축을 울리는 물소리는 수천만년 전 이 곳이 바다였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듯 하다. 산행은 새벽녘 네팔 산간부족 특유의 원추형 대나무 등짐통인 도코(Doko)를 이마에 매고 가는 포터들의 이동과 함께 시작된다. 한나절새 고도를 1,500m 이상 끌어올려야 하는 코스인만큼 고소증에 주의해야 한다. 산소 결핍과 기압 저하로 머리가 아파오고 속이 메스꺼우면서 식욕이 떨어지기 십상이다. 무리하지 않고 보온과 수분섭취에 신경을 쓰는 게 최상이다. 도반에서 한 시간쯤 가면 타르촉을 두른 불탑을 만난다. 이 지점부터 살생이 금지된다. 히말라야 롯지에서 데우랄리까지는 가파른 산길이다. 데우랄리를 넘어서면 초원지대가 펼쳐지며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가 보인다. 양끝이 뾰족한 마차푸차레는 그 모습이 마치 금방 물 속에서 솟아오른 물고기의 꼬리같다. 그래서 ‘피쉬 테일(Fish Tail)’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힌두교도들에게 가장 추앙을 받는 신 시바와 부인 파르바티가 살았다는 곳이다. 네팔 정부도 신성하게 여겨 등반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아직껏 미등정 봉우리로 남아 있는 이유다. M.B.C를 지나 다시 고산 초원을 1시간30분쯤 오르면 어느 순간 ‘헉’하고 숨이 멎는다. 안나는 어느새 성큼 다가와 초야(初夜) 신방의 새색시와도 같이 순결한 자태로 트레커를 영접한다. /글·사진 네팔 안나푸르나=정후식기자 who@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