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히말라야에 든다. 정상만이 전부인 것처럼 암설릉 부여잡고 꼭대기까지 아등바등 오르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그 발치에서 풍경 속에 스며들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대자연의 울림 속으로 들어가 퇴화되어 버린 삶의 원초적 리듬을 되찾기 위한 몸짓이다. 어느 가풀막진 오르막에서 욕망으로 뒤틀린 겹겹의 내면과 마주치면, 하여 진정으로 넘어서야 할 그 무엇을 깨우친다면 그대로 산이 된들 어떠랴.
만년설 덮인 산정을 향한 클라이밍(Climbing)이 고행의 길이라면, 그 중턱을 맴도는 트레킹(Trekking)은 명상의 길이다. 안나푸르나(Annapurna, 8,091m)에 이르는 여정은 여기에 탐미(耽美)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길거리나 산길에서도 신을 섬기는 네팔리들의 깊은 신앙심은 신성함까지 더해준다.
길은 안나푸르나 남봉(7,219m)과 마차푸차레(Machhapuchhre:6,997m) 사이를 흐르는 모디 콜라(Modi Khola)강 계곡을 따라 뻗어 있다. 안나의 남면 베이스캠프(A.B.C)까지 곧바로 직선으로 파고 드는 생츄어리(Sanctuary:聖所) 코스다.
포카라(Pokhara)∼나야풀(Nayapul:1,070m)∼비레탄티(Birethanti)∼샤울리바자르(Syauli Bajar:1,220m)=4시간
카트만두에서 서쪽으로 200km가량 떨어진 네팔 제2의 관광도시, 해발 900m의 분지에서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를 비롯 7,000∼8,000m급 은백의 거봉들을 조망할 수 있는 포카라는 히말라야 등반과 트레킹의 출발점이다. 페와(Phewa) 호수와 사랑콧(Sarangkot)의 해돋이, 해넘이는 온 몸에 잊지못할 전율을 각인시킨다.
포카라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30분가량 서쪽으로 이동하면 A.B.C 트레킹이 시작되는 나야풀. 100여개 이상의 장비점과 생필품 가게가 줄지어 선 마을을 통과하면 모디강의 물소리가 커지기 시작한다. 유난히도 빨간 고추잠자리, 싱그러운 풀냄새, 포로롱 나뭇가지를 차고 오르는 산새들…. 샤울리바자르까지는 그야말로 ‘소풍가는 길’이다.
‘나마스떼’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행인들이 오가는 맨 마당에 개설된 마을학교, 뭔가 단 것을 달라며 ‘스윗(sweet)!’을 외치며 따라다니는 아이들. 현대문명의 손길이 채 침범하지 않은 대자연 속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원주민들을 만나는 기쁨은 안나푸르나가 주는 또 다른 선물이다.
푼힐 전망대 갈림길인 비레탄티의 다리에는 티벳 불교의 가르침을 새긴 오색 깃발이 하늘 높이 휘날린다. 타르촉(Tarchog)이라 불리는 이 깃발들은 마을 입구나 롯지, 초르텐(불탑) 등 어느 곳에서나 쉬 만날 수 있다. 진리가 청량한 바람을 타고 널리 퍼져 모든 중생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한다. 트레커나 포터들에게는 안전하고 성공적인 산행의 심벌로 해석되기도 한다. 옴 마니 반메 훔!
샤울리 바자르∼큐미(Kyumi)∼뉴 브릿지(New Bridge)∼지누단다(Jhinudanda)∼촘롱(Chhomrong:2,170m)=8시간
롯지의 아침은 분향(焚香)으로 시작된다. 주인은 향불을 정성스레 피워놓고 설산을 향해 합장하며 하루를 연다. 그윽한 향내는 나그네의 몸과 마음까지 정화시킨다. 구릉족 마을인 간드렁(Ghandrung)과 란드렁(Landrung)으로 우회하는 대신 계곡 옆 골짜기를 곧장 파고 들면 안나푸르나 산군이 힐끗 그 위용을 드러낸다. 다랑이 논·밭들도 덩달아 하늘에 닿을 듯 치솟아 장관을 이룬다.
뉴 브릿지에 이르기까지 모디 계곡과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던 산길은 지누단다를 지나면 본격적인 오르막으로 접어든다. 성하의 짙은 녹음은 매미소리마저 쇳소리가 나게 한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가파른 옥수수밭을 헤쳐가는 동안 다리는 석고처럼 뻣뻣해진다. 심장은 터질 듯 거칠어진다. 하지만 한동안 그 상태가 지속되면 몽롱함에 오히려 마음은 편안해진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일까.
한나절 새 1,000m가까이 고도를 올린 보람은 있다. 촘롱에 서면 처음으로 전망이 탁 트인다. 안나푸르나 남봉과 히운출리, 마차푸차레가 동서로 도열해 트레커를 영접한다.
/글·사진 네팔 안나푸르나=정후식기자 who@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