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 버스 도착 시간이 촉박하다. 아무래도 뛰어야 할 것 같다. 열심히 뛰어 가까스로 버스에 올라탔다. 심장에 부족한 산소를 연신 주입하며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는 우리 부부에게 순환 버스 기사님이 칭찬은커녕 면박을 늘어놓는다.

“앗따! 머시 그라고 급하다요? 여그서는 뛰면 안된당께요! 순환 버스 놓치면 다음 버스 타면 되고, 그것도 놓쳐 불면 걍 여그서 자고 내일 가면 되제라잉~”

얼마 전 완도 청산도 여행 중 겪은 일이다. 아시아 최초의 슬로우 시티에 선정된 청산도에서는 뛰는 사람이 없다. 뛰는 것이 금지(?)된 청산도에서 우리처럼 뛰다가는 구박받기 십상이니 그럴 수 밖에…. 그러나 내가 누군가? 한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은 한국은행 직원답게 여행 계획도 치밀하기 그지없다.

미리 예약한 완도와 청산도 간 배 시간을 맞추면서 청산도를 제대로 관광하려면 40분 간격의 주말 순환 버스를 놓치는 우를 범할 수 없다. 완도까지 왔는데 청산도만 보면 섭섭하다. 신지도 명사십리 해수욕장 모래 사장도 걸어봐야 하고, 해상왕 장보고의 청해진 유적지를 놓치면 어찌 완도를 보았다 할 수 있겠는가? 완도 수목원은 청해진 유적지에서 16㎞ 떨어진 곳으로 23분이 소요되니 배 시간을 감안해서 수목원 관광은 서둘러야 할 것이다. 청해포구 촬영지도 멋진 곳이고 정도리 구계등은 완도에서만 볼 수 있는 비경이다. 전복도 먹어야 하고…. 나의 1박 2일 여행 계획서는 시간대별로 빼곡하다.

여행 목적지별 거리와 소요 시간 등을 감안하여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대로 여행을 마치고 광주에 도착했다. 무엇이 남았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 여행객들의 여행 목표는 힐링이다. 더구나 청산도를 가는 사람들은 느림을 통해 정신없는 일상을 치유하는 뚜렷한 목표가 있다. 하지만 나의 완도 여행은 시간대별로 철저하게 계산되고 조직화된 스케줄에 따라 바삐 움직인 나머지 힐링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정해진 시간을 맞추려 힘들게 쏘다닌 스트레스 유발형 고난 여행이 아니었나?

우리나라가 구조적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많은 사람들의 걱정이 태산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금융 위기론까지 서슴없이 제기한다.

과연 우리 경제가 그렇게 취약한가? 필자의 소견은 좀 다르다. 생산성 둔화로 자동차 등 주력 제조업의 글로벌 경쟁력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의 성장률 둔화는 우리나라가 고도 성장 과정에서 자본 축적도가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한 나머지 투자가 부진하였고, 미중 무역 전쟁 등으로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영향이 컸다.

1인당 GDP가 3만 달러를 넘어선 국가가 고성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도 있다. 국제적으로 비교해 보아도 2% 중반 정도의 성장률은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다. 지나치게 높은 우리나라의 자영업자 비중(취업자의 25%)을 국제 수준(OECD 평균 10%)과 비교해 보면 최근의 자영업자의 어려움도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다.

경제는 심리다. 낮은 성장률과 자영업자의 어려움 등으로 경제 주체들이 잔뜩 위축되어 있는데, 일부 언론과 경제 전문가들이 근거가 미약한 금융 위기론까지 서슴없이 언급할 경우 오히려 ‘자기 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현상으로 경기 둔화를 부채질하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

지난 50년간 숨가쁘게 달려온 우리 경제가 조금 느리게 가면 어떤가? 성장률이 조금 더디더라도 취약 계층을 보살피면서 같이 가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내가 청산도의 순환 버스를 놓치고 하룻밤을 더 머물렀더라면 이번에 가보지 못한 ‘느림 우체국’에도 들렀을 것이고, 1년 후 느리지만 아름다운 추억 편지를 받아볼 수 있었을 텐데…. 지나치게 빠른 내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