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면 출근하는 무진대로 양쪽으로 장벽처럼 둘러 핀 노란 개나리꽃들을 본다. 봄을 알리는 전령사들이 많지만 내게는 개나리꽃보다 더 반가운 얼굴이 없다. 그리고 개나리꽃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분이 하나 있다. 영원한 청년,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이 그분이다.

식민지 시절 여름 오후 늦은 때, 이상재 선생이 서울 종로 YMCA회관에서 강연을 하시다가 청중들 뒤쪽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일본 순사들을 보셨다. 그걸 보는 순간 이상재 선생은 유리창 너머 먼 산을 바라보시면서 “어허! 초봄이 지난 지 한참인데 개나리들이 만발을 했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일본 순사들을 ‘나리’라고 높여 불렀는데 거기에 ‘개’자를 붙여 ‘개나리’라고 에둘러 말씀하셨으니 그 의미를 이해한 사람들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고 하는 일화다.

그래서 그런지 개나리꽃이 필 때면 촌철살인(寸鐵殺人)과 같은 교훈으로 백성들과 청년들의 의식을 깨우친 반면 일제에 붙어 권세를 유지하던 자들에게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면서 나라 사랑을 온 몸으로 실천하셨던 선생의 모습이 떠올라 남다른 감회에 젖곤 한다.

개나리란 이름은 참나리의 ‘나리’에 ‘개’자를 붙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보통 본디 식물보다 못한 다른 식물에는 ‘개’를 붙이고, 비슷하게 생긴 식물에는 ‘나도’, ‘너도’, ‘아재비’ 등을 붙인다. 개두릅, 개머루, 개살구, 개가시나무 등이 그렇고, 나도밤나무, 너도밤나무, 미나리아재비 등이 그렇다.

그런데 겉보기에만 참나리를 축소해 놓은 듯 한 모습 때문에 나리보다 못하다 하여 개나리라고 명명(命名)한 것 같은데 알고 보면 참나리와 개나리는 전혀 다른 종의 식물이다. 개나리는 떡잎이 두 장인 쌍떡잎식물로 물푸레나무과 개나리속 개나리종으로 구분되고, 참나리는 떡잎이 한 장인 외떡잎식물로 백합과, 나리속, 참나리종으로 구분된다.

개나리는 한반도에서 흔한 특산종이다. 학명도 ‘포르시띠아 코리아나’(Forsythia koreana)이다. 울타리든 들판이든 가리지 않고 뿌리를 내린 곳이 저들의 삶터이다. 따로 열매 맺어 씨를 퍼뜨리지 않아도 꺾이고 부러져 밟힌 가지들이 거기서 다시 뿌리를 내려 저들만의 강인한 삶을 이어간다. 우리네 민초들의 모습을 꼭 빼닮았다.

요즘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고 부인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온 나라가 시끄럽다. 잘못을 끝까지 은폐하고 인정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질문하는 기자에게 “이거 왜 이래?”라고 역정을 냈던 분도 있고, 잘못된 역사인식으로 인해 설화(舌禍)를 자청하는 이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나도 “개나리가 만발했네”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이상재 선생처럼 그런 작은 말 한마디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할 만한 권위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도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하련다. 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만일 내가 그렇게 부른다면 진짜 꽃 개나리가 서러워할 것 같아서 차마 못 하겠다.

3월 29일은 이상재 선생이 소천(召天)하신 지 92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 기록에서는 그를 일제 강점기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장, 조선교육협회장, 신간회 창립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민권 운동가, 청년 운동가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영원한 청년 이상재’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 닿는다. 고령의 나이에도 청년들의 눈높이에 맞춰 활동하는 그에게 어떤 사람이 “선생님 나이에 맞지 않게 왜 그러시느냐?”고 말하자 “그럼 내가 청년들에게 맞춰야지 청년들이 나이든 사람들처럼 하도록 해야 옳겠느냐?”고 반문하셨다는 그이기에 영원한 청년이라는 수식어가 무척 잘 어울린다.

개나리꽃이 만발한 봄날에 어지러운 조국의 모습과 내 고장 광주를 향한 수치를 모르는 말(言)의 배설물들을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면 어떤 촌철살인의 말씀(語)으로 저들을 부끄럽게 하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