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춘평 박사, 그의 이름을 떠올릴 때면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여 가슴이 울컥해진다. 나는 생전에 박사를 만나 본 적이 없다. 다만 박사에 관한 신화 같은 생애의 이야기를 많은 분들에게서 간간이 들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박사를 생각하면 행복하면서도 한편으로 가슴이 아파 오는 감정이 교차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자신을 희생하며 타인을 생각하는 근원적인 선함을 지닌 사람.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의 태도에 너무 오랫동안 젖어 있는 우리들의 시선 때문일까, 촛불이 불을 밝히는 것은 자신을 태우는 희생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들은 박사의 이야기는 지금은 잃어버린 선한 인간의 감성을 깨닫게 한다.

임춘평 박사는 모든 대가나 명예를 생각하지 않는 진정한 배려와 사랑을 실천했다. 박사의 삶은 남의 아픈 어려움을 보고서도 미동도 하지 않는 얼음같이 차가운 감정을 산산이 부수고 뒤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박사의 지나온 삶의 행로는 더욱 소중하다.

기업이 문화 예술을 지원하는 활동을 메세나 운동이라 한다.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의 정치가였던 마에케나스가 당대의 대시인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를 후원한 것이 효시가 되었다. 마에케나스의 프랑스식 발음이 ‘메세나’다. 1400년대에 와서는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에서 상업을 통해 재력을 얻게 된 메디치 가문이 막대한 사재를 통해 도나텔로, 프라 안젤리코, 기베르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군주론’을 지은 마키아벨리 등을 지원하게 되어 메세나 운동의 효시적인 상징이 되었다.

이후 메세나가 지금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1966년 미국 체이스 맨해튼 은행의 회장이었던 데이비드 록펠러가 문화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데서 시작되었고, 각국으로 확산되었다. 1994년 4월 한국에서도 메세나협의회가 발족되어 185개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필자가 메세나 운동을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메세나 운동이 지역에서 힘들게 작가 생활을 하는 대다수의 작가들에게 후원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메세나 운동은 그만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나 무명의 작가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박사가 실천했던 예술가와 같이 호흡하고 부대끼며 함께했던 것과는 방향이나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박사는 소외된 예술가와 어려운 학생들과 어려움을 같이 나누었다. 그림을 모아서 가치가 오르는 자본의 의미가 아닌 예술가의 눈물과 슬픔까지 끌어안은 삶이었다.

진료가 끝나면 금남로 가톨릭센터 뒤 성안식당, 영흥식당에서 막걸리 내음 풍기는 낡은 탁자에 앉아 미술인들과 술잔을 주고받았다. 박사의 이야기는 좌중을 휘감았고 박사가 권한 술잔은 단순한 술잔이 아니었다. 어떤 이념이나 이론이 아닌 ‘그냥 사랑’의 모습이 박사가 사는 모습이었다. 박사가 지금 우리 곁에 있었으면 이런 모임 자체도 사양했을 것이다. 그만큼 박사의 삶과 의식은 자유스럽고 예술적이었다. 신화처럼 내려온 수많은 행적들은 그동안 언론이나 세간의 이야기로 알려져 왔기 때문에 구구절절 되뇌일 필요는 없겠다. 그렇지만 박사의 삶의 행적을 박제된 형태로 남길 수는 없다. 그만큼 이 시대가 삭막하기 때문이다.

임춘평 박사의 삶의 모습이 감동으로 전해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자기의 몸을 태워 주위를 빛으로 밝히는 촛불의 의미가 임춘평 박사의 정신을 통해 정립되고 전해져야 한다. 그것이 박사를 사랑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읊조렸던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세상의 위로를 진정한 사랑으로 살았던 임춘평 박사. 53년의 짧은 생애동안 다른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살다 정작 어머니를 생각만큼 돌보지 못한 자책감으로 머릿결이 다 빠져 버린 눈물의 소유자. 박사의 삶이 척박한 시대에 다시 한 번 촛불로 타오르길 기원한다. 오는 29일 오후 2시 무등산 자락 무등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광주사람, 임춘평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작은 출발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