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이후 재택 근무가 화두로 떠오른 적이 있었다. IT 인프라의 발달로 업무 수행에 시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확산되면서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투어 재택 근무를 도입했었다. 특히 IBM은 ‘통근자 고통 지수’라는 지표까지 개발할 정도로 재택 근무제를 신봉하고 확산시켰던 원조 격이었다. 그랬던 IBM이 지난해 이맘때쯤 재택 근무제를 전격 폐지하기에 이른다.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당시 IBM은 실적 부진 및 수익성 악화라는 표면적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보다 실질적인 재택 근무 폐지 이유는 집에서 혼자서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이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는 이유에서였다. 사무실에서 동료 직원들과의 소통과 협업을 통한 의사 결정 방식이 창의성 발휘와 성과 창출에 훨씬 유리하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현재 글로벌 IT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구글, 페이스북, 애플 등 대부분의 실리콘 밸리 기업들이 일반의 예상과 다르게 재택 근무보다는 사무실 근무를 선호하는 전략과 유사하다.

글로벌 금융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월가의 펀드 매니저들은 천문학적 연봉에 걸맞게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한 만큼 개인적인 역량이 매우 우수한 집단이다. 그럼에도 수십명의 딜러들이 개인별 칸막이도 없는 탁 트인 딜링룸에서 같이 근무한다.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민주적이며 집단적인 의사 결정과 협업의 장점을 뛰어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광주에서는 이런 협업과 민주적 의사 결정의 끝판 왕을 보여준 사례가 있었다. 바로 며칠 전에 발표되었던 ‘도시철도 2호선’ 건설에 대한 결정 과정이다. 2002년에 도시철도 2호선 건설 기본 계획이 수립되었으니 자그만치 16년 동안의 찬반 논란 끝에 시민 참여단이 2호선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만큼 결정하기가 난해한 사안이었을 것이다. 교통 인프라 확충을 위해 2호선 건설 필요성은 대부분 공감하였지만 경제성과 사업성이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1호선의 수송 분담률이 2.7%에 불과하고 개통 이후 10년간 광주시가 보전해준 지하철 적자가 3000억이 넘으면서 2호선 건설에 대한 백가쟁명식 찬반 논란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물론 공론화와 민주적 의사 결정을 거치지 않고 일부 전문가들만 모여 건설 여부를 결정했더라면 좀 더 효율적이고 단기간에 의사 결정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은 민주화 상징 도시인 ‘의향’의 명성에 걸맞게 민주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느리고 힘들지만 협업과 소통이 필수적인 공론화의 산고를 견뎌낸 것이다. 산고의 고통이 컸던 만큼 건설을 반대했던 시민들도 결과를 흔쾌히 수용하는 성숙한 시민 의식을 보여주었다.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된 공론화 과정이 자랑스럽다.

동네 아저씨들의 바둑판에는 항상 훈수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훈수꾼 개개인의 바둑 실력은 대체로 하수인 경우가 많다. 상수는 시합의 공정성을 감안해 훈수를 잘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하수들이지만 여럿이 모여 훈수를 하다 보면 실력에 걸맞지 않게 뜻밖의 묘수가 등장한다. 그 묘수는 바둑판의 승패를 역전시킬 정도로 강력하여 경기를 포기할 뻔 하던 약자에게 희망과 승리를 선사한다. 물론 훈수가 공정성을 해친다는 까탈스러운 지적도 있겠으나 ‘동네 바둑’이라는 아마추어리즘에 충실하다 보면 별 문제가 될 것도 없다. 더구나 신의 한수를 발견한 훈수꾼들 개개인의 실력이 변변치 않은 하수에 불과하다면 하수들의 집단 지성은 더욱 소중하게 평가되어야 하지 않는가.

광주에는 앞으로도 이런 훈수가 필요한 곳이 많다. ‘광주형 일자리’가 그렇고 ‘한전 공대’ 설립 과정에서도 소통과 협업 끝에 신의 한수를 발견해 내는 훈수꾼들의 집단 지성이 절실히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