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황옥주 광주수필문학회 회장-순임금과 생선 도막
2018년 11월 15일(목) 00:00 가가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그 만남의 하나하나는 운명 같은 것이다.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싫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연(緣)이 아닌 만남은 끊어버리고 싶고, 순연(順緣)이라면 영속되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마음일 터다.
최근 내가 속한 수필작가회의 이사 모임 식사 자리에 꽁치 구이가 나왔다. 나름대로 예를 갖춘다고 꼬리 쪽을 떼어 먹으려 하자 바로 앞에 계시던 여자 분이 젓가락으로 막으신다. 평소 집에서도 꼬리 쪽은 남자들이 못 먹게 하신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내 어릴 적 서당훈장 님의 얘기가 번개처럼 떠올라서다. 천자에 오르기 전의 순임금의 얘기다. 잊고 살았어도 하도 여러 번 들었던 터라 기억의 재생도 빨랐다. 그분도 순임금의 얘기를 익히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아니고서야 그렇게 진지하게 막았을 것 같지 않아서다.
철모른 예닐곱쯤 되었을 것이다. 집과 가까운 곳의 제각에서 겨울철이면 수염이 긴 근엄한 훈장님을 모셔다 서당을 열었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억지춘향 서생(書生)이 된 나는 층층이 형 뻘이라 처음은 다니기가 싫었다. 그것도 잠시, 며칠 안 가 금방 재미가 붙었다. 공부가 즐거워서가 아니라, 입담 좋은 훈장님의 얘기가 좋아서다. 천자문 풀이부터가 전부 얘기였다. 겨울 서제가 열리는 날이 기다려졌고, 서당이 시작되면 남 먼저 서당으로 달렸다.
‘동몽선습’(童蒙先習)에 이르면 짤막짤막한 중국 역사가 등장한다. 삼황오제로부터 요순, 탕, 주, 걸, 소부, 허유 등등…. 훗날 내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음도 서당 공부가 한 원인(遠因)이었다 생각한다.
어려서 생모를 잃은 순임금은 계모 밑에서 자랐다. 천성이 효자라 성(誠)을 다해 계모를 모셨으나 아버지 고수는 후처의 사주에 빠져 순을 미워했다. 아버지가 계실 때만 어머니로 대할 뿐, 불효가 심하다는 고자질을 믿어버린 것이다. 데리고 온 ‘상’이라는 이복동생도 악동이라 그들의 학대를 감당키 힘들어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는 순이다.
그럴수록 계모와 ‘상’은 기회를 만들어 순을 죽이려 모사를 꾸몄다. 물이 잘 솟는 우물을 두고도 새 우물을 파자고 했을 때, 눈치를 챈 순은 일정한 간격으로 곁길을 만들며 파내려갔다. 물길이 보이는 깊이에 이르자 갑자기 위에서 흙이 쏟아졌다. 예상했던 바라 순은 파 놓은 곁길로 피했다가 흙이 차오르면 또 위의 곁길을 이용, 목숨을 보전했다.
멀쩡한 헛간채의 지붕 수리를 시켰을 때는 큰 삿갓을 가지고 올라갔다. 상옥추계(上屋抽梯·지붕으로 올려놓고 사다리를 치움)를 계산한 것이다. 예상대로 사닥다리를 없애고 밑에서 불을 놓자 삿갓을 낙하산 삼아 화를 면했다.
계모는 생선 반찬도 언제나 머리가 큰 고기를 사서 머리 쪽을 짧게 잘라 순에게 주었다. 부피는 있으되 살이 없으니 뼈만 빨았다.
하루는 순이 계모 앞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리며, “어머니의 깊은 사랑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큰 사람이 되라고 고기의 머리 도막은 꼭 저에게 주시니….”
그 말을 듣고 그럴 같았던지 다음날부터 배당이 바뀌었다. 짧게 잘라진 생선 꼬리였으나 그래도 머리 도막보다는 먹을 것이 있었다.
남들이 알세라 숨기려 해도 소문은 바람이 눈치채고 하늘이 안다. 순의 사람됨과 효행을 들은 요임금은 제 아들을 제치고 순에게 양위했다.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할 사람은 순이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쁜 두 딸까지 맡겼다. 행운은 저절로 들어오지 않는다.
어렸을 때, 이런 얘기가 어찌 흥미롭지 않았을까? 글을 쓴다는 지금, 영글지 못한 머릿속에 한 가지라도 더 넣어주고자 얘기로 달래며 애쓰셨던 서당 훈장님이 너무 그립다.
얘기는 얘기일 뿐이지만 얘기 속에는 교훈이 담겨져 있다. 그 교훈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과 한갓 얘기로 흘러버리는 사람과는 삶의 가치관까지 다르다. 이제까지 생선 꼬리를 먹지 말라는 분을 만나기는 일생에 딱 한 번 그때 그분뿐이었다.
글쓰기는 초벌이 있고 청서(淸書)가 있다. 인생은 청서 없이 초벌로 끝나고 만다. 소중한 교훈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인생을 청서하며 산다는 것과 같다. 그런 사려 깊으신 분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잊을 수 없는 감동이다.
이제, 아무리 머리 토막만을 먹어도 훌륭하게 될 밑천이 바닥난 지금에 이르러 순임금 이야기를 기억해본들 무슨 소용이리. 때 늦은 흉내일지라도, 나도 생선 꼬리는 내 몫으로 하며 살고 싶다.
최근 내가 속한 수필작가회의 이사 모임 식사 자리에 꽁치 구이가 나왔다. 나름대로 예를 갖춘다고 꼬리 쪽을 떼어 먹으려 하자 바로 앞에 계시던 여자 분이 젓가락으로 막으신다. 평소 집에서도 꼬리 쪽은 남자들이 못 먹게 하신다는 것이다.
철모른 예닐곱쯤 되었을 것이다. 집과 가까운 곳의 제각에서 겨울철이면 수염이 긴 근엄한 훈장님을 모셔다 서당을 열었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억지춘향 서생(書生)이 된 나는 층층이 형 뻘이라 처음은 다니기가 싫었다. 그것도 잠시, 며칠 안 가 금방 재미가 붙었다. 공부가 즐거워서가 아니라, 입담 좋은 훈장님의 얘기가 좋아서다. 천자문 풀이부터가 전부 얘기였다. 겨울 서제가 열리는 날이 기다려졌고, 서당이 시작되면 남 먼저 서당으로 달렸다.
그럴수록 계모와 ‘상’은 기회를 만들어 순을 죽이려 모사를 꾸몄다. 물이 잘 솟는 우물을 두고도 새 우물을 파자고 했을 때, 눈치를 챈 순은 일정한 간격으로 곁길을 만들며 파내려갔다. 물길이 보이는 깊이에 이르자 갑자기 위에서 흙이 쏟아졌다. 예상했던 바라 순은 파 놓은 곁길로 피했다가 흙이 차오르면 또 위의 곁길을 이용, 목숨을 보전했다.
멀쩡한 헛간채의 지붕 수리를 시켰을 때는 큰 삿갓을 가지고 올라갔다. 상옥추계(上屋抽梯·지붕으로 올려놓고 사다리를 치움)를 계산한 것이다. 예상대로 사닥다리를 없애고 밑에서 불을 놓자 삿갓을 낙하산 삼아 화를 면했다.
계모는 생선 반찬도 언제나 머리가 큰 고기를 사서 머리 쪽을 짧게 잘라 순에게 주었다. 부피는 있으되 살이 없으니 뼈만 빨았다.
하루는 순이 계모 앞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리며, “어머니의 깊은 사랑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큰 사람이 되라고 고기의 머리 도막은 꼭 저에게 주시니….”
그 말을 듣고 그럴 같았던지 다음날부터 배당이 바뀌었다. 짧게 잘라진 생선 꼬리였으나 그래도 머리 도막보다는 먹을 것이 있었다.
남들이 알세라 숨기려 해도 소문은 바람이 눈치채고 하늘이 안다. 순의 사람됨과 효행을 들은 요임금은 제 아들을 제치고 순에게 양위했다.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할 사람은 순이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쁜 두 딸까지 맡겼다. 행운은 저절로 들어오지 않는다.
어렸을 때, 이런 얘기가 어찌 흥미롭지 않았을까? 글을 쓴다는 지금, 영글지 못한 머릿속에 한 가지라도 더 넣어주고자 얘기로 달래며 애쓰셨던 서당 훈장님이 너무 그립다.
얘기는 얘기일 뿐이지만 얘기 속에는 교훈이 담겨져 있다. 그 교훈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과 한갓 얘기로 흘러버리는 사람과는 삶의 가치관까지 다르다. 이제까지 생선 꼬리를 먹지 말라는 분을 만나기는 일생에 딱 한 번 그때 그분뿐이었다.
글쓰기는 초벌이 있고 청서(淸書)가 있다. 인생은 청서 없이 초벌로 끝나고 만다. 소중한 교훈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인생을 청서하며 산다는 것과 같다. 그런 사려 깊으신 분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잊을 수 없는 감동이다.
이제, 아무리 머리 토막만을 먹어도 훌륭하게 될 밑천이 바닥난 지금에 이르러 순임금 이야기를 기억해본들 무슨 소용이리. 때 늦은 흉내일지라도, 나도 생선 꼬리는 내 몫으로 하며 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