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기 선생이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한 때는 1976년 3월이었다. 이 잡지는 그러나 1980년 8월에 통권 50호를 끝으로 사라졌다. 신군부의 입맛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잡지는 단명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나는 이 잡지가 남긴 ‘민중 자서전’과 ‘한국의 발견’ 시리즈를 특별히 아낀다.

‘민중 자서전’을 보면 ‘그때는 고?고롬 돼 있제’라든가 ‘이 계동마님이 먹은 여든 살’처럼 제목부터 정이 듬뿍 느껴진다. 여러 차례 주인공들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녹음한 다음 토씨하나 빠트리지 않고 옮겨 적었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그분들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요즘의 인터뷰나 인물 기사는 짧고 일회성인 경우가 많다. 시사성이 큰 인물은 특별 대우를 받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몇 회에 걸쳐서 연재되거나, 지나온 삶을 차분히 돌아보는 기사는 드물다. ‘민중 자서전’에 담겨있는 체온과 정성을 느끼기는 어렵다. 화제의 인물을 모두 소개하기는 어렵겠지만, 인물에 따라서는, ‘민중 자서전’ 방식으로 접근해서 그 주인공들이 몇 회에 걸쳐 스스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지면을 제공한다면 신문과 잡지는 시대와 인물의 숨소리를 담아내는 역사성까지도 담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신문에서 역대 광주시장 회고록, 김남주와 함께 보낸 젊은 날, 들불 야학의 강학들, 양동시장에서 보낸 한 평생, 기아 타이거즈와 더불어 반세기 등의 기사를 만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스치고 지나가는 일회성의 기사가 아니라, 인물들의 이야기를 차분히 읽어볼 수 있는 연재 기사로 만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나중에 이런 기사들이 신문사의 이름으로 출판된다면 우리 고장의 자랑이 될 수도 있겠다.

이번에는 ‘한국의 발견’ 시리즈를 살펴보자. 이중환의 ‘택리지’나 ‘세종실록지리지’같은 조선 시대의 간행물을 제외하면 한국의 여러 지역을 소개한 인문지리서가 거의 없다는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한국의 발견’ 열 권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 이 아름답고도 알맹이가 토실토실한 보물을 닮은 인문 지리서(지역 소개서)가 많이 나오기를 기대했는데, ‘보물’이 태어난 지 40년이 다 되도록 소식이 없다. 조금 실망스럽다.

요즘 신문이나 잡지에는 지역에 대한 지리 정보가 넘쳐난다. 지방 신문에서도 다른 나라의 기사를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내 고장이 어떤 지역인가를 재미있게 소개하는 기사는 드물다. 드론에서 내려다보듯이 내 고장을 종합적으로 살피고 설명하는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단편적인 지역 정보를 하나하나의 구슬이라고 볼 때, 구슬을 물어 나르는 기사는 차고 넘치는 데, 구슬을 하나의 실로 꿰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격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우리 고장에 고속도로가 뚫리고 신시가지가 조성된다는 소식은 신문이나 잡지가 당연히 다루어야 할 뉴스이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지역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살피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해야 한다. ‘한국의 발견’ 시리즈를 엮어냈던 기자나 작가들이 가지고 있던 의식, 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통합해서 기술하고자 했던 정신을 되살렸으면 좋겠다.

목포, 여수, 해남, 강진 등등 지역을 차례차례 살피고 조망(眺望)하는 기사는 월 1회 정도 특집 기사로 다루면 좋겠다. 광주같이 큰 도시는 서구, 동구 등 구별로 나누어서 관찰해도 좋을 것이다. 2년이나 3년이 지나면 모든 시군을 다 취재하게 되는데, 그 다음에는 이미 다루었던 지역을 다시 순차적으로 취재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독자들은 관심 지역이 어떻게 변해가는 지를 파악할 수 있다. 요즘엔 시군 어디에나 지역신문이 있고 기자들이 있으니 이분들을 그 지역의 특파원으로 활용하면 좋겠다. 지역을 전체적으로 살피다 보면 주먹구구식 개발을 막아내고 지역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일도 가능해 질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이 변하고 쉽게 사라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내 고장의 신문과 잡지가 사람과 지역의 변화를 더 충실하게 기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지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