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코카서스 삼국 중 조지아, 아르메니아 순례 여행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흑해의 보석 크림 반도로 떠났다.

크림반도, 흑해, 세바스토폴. 근래 몇몇 여행자들로부터 들었던 멀고 먼 곳의 지명들이다. 크림이라는 달콤한 지명, 많은 바다 이름 가운데 흑해라니. 그리고 항구 세바스토폴. 푸쉬킨과 체호프, 톨스토이 등 러시아 대문호들이 사랑했던 크림반도.

크림반도를 끼고 있는 흑해는 유럽 남동쪽 끝과 서아시아 사이에 있는 거대한 내해로 불가리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러시아, 조지아, 터키에 둘러싸여 있다. 크림반도는 흑해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오랫동안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며 주변 강대국들의 각축장으로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던 곳이기도 하다.

‘화가 아이바로스키미술관 앞 철로변’

■아름다운 항구 세바스토폴과 크림전쟁

크림전쟁은 1853년 제정러시아의 황제인 니콜라이 1세가 흑해를 통해 지중해로 세력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오스만제국(터키),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사르데냐 연합국과 벌인 전쟁이다. 그 당시 세바스토폴은 크림반도의 핵심전략 요충지로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던 곳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이 전쟁에 포대장으로 참전해 세바스토폴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영국의 간호사 나이팅게일의 헌신적인 간호 활동으로도 유명하다.

세바스토폴 원형 파노라마 박물관의 그림은 크림전쟁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연한 그림으로 그 규모와 재현 방법이 상상을 초월하는 압권이다. 관람하는 동안 직접 전쟁터에 참전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정교하고 방대하다. 5·18 광주민주항쟁의 역사를 가진 우리로서는 이런 감동적인 재현물이 없다는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모스크바에서 심페로폴에 도착한 후 다음날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500년간 지배했던 크림칸의 궁전과 고대 동굴도시 추풋-칼레로 향했다. 크림 칸의 궁전은 푸시킨의 시 ‘분수의 눈물’로 유명한 대리석 분수가 있다. 칸의 궁전에 피어있는 붉은 꽃의 눈물이 병약해진 푸쉬킨의 시 에 흐르는 것 같았다.

‘레세르 예루살렘 마을’

■역사와 예술이 만나는 곳 얄타

크림반도의 얄타는 우리에게는 아픈 역사를 남긴 곳이다. 루즈벨트와 처칠, 스탈린은 이곳에서 우리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남과 북으로 분단국가를 만들었다. 얄타는 아름다운 흑해연안 휴양지로 유명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누구에게는 아픈 상처의 기억일 수 있다.

여행자는 작은 배에 의지하여 흑해를 지난다. 배에서 내린 곳은 피아도시아이다. 피아도시아에는 이곳의 유명한 풍경화가인 아이바조브스키의 미술관이 있다. 모든 풍경이 그의 영혼에서 본 바다의 풍경이다. 그 날 피아도시아의 저녁 만찬은 잊을 수 가 없다. 벽에 러시아풍의 매력적인 피아노를 부착시킨 독특한 장식의 식당에서 중년여성이 연주하는 첼로의 화음과 함께 우리는 와인에 취했다. 그날 나는 한편의 시를 썼다.

피아도시아 숲길의 첼로.

포플러 나무숲을 지나

‘레세르 예루살렘 마을’

피아도시아 앙트레솔에 가면

노을을 닮은 첼리스트가 있다네

그녀가 켜는 소리가 깊어 질 때면

여행자는 잃어버린 어머니의

나즈막한 이야기에 빠져드네

횟빛벽에 저녁의 눈물이

찾아오는 시간

올가 아르카지에프는 지친 사내들의 촉촉한 눈빛으로 기척도 없이 들어오네

체호프의 늙은 배우는 푸시킨의 시를 읊조리고

‘제노바 요새’

이방의 화가는 아이바로스키의 물결 속을 걸어가네

벽에 걸린 검은 음악은

붉은 와인에 취해 춤을 추고

이제 밤이 느린 걸음으로

걸어오는 시간

이방의 여행자는 길을 떠나네

먼 길

바람이 지나간 길 너머

먼저 길 떠난 여행자를 따라 길을 떠나네

‘크림 칸의 궁전’

■크림반도의 예루살렘 마을 예브파토리아

아이바조프스키 무덤과 아르메니아 사원을 거쳐서 도착한 예브파토리아의 레세르 예루살렘 거리. 예루살렘 거리는 낡은 벽과 중세풍의 집들로 기독교, 카톨릭, 이슬람, 유대인, 크리미안 타타르 문화가 혼재되어 있으나 평화스러웠다.

모스크바를 거쳐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세바스토폴의 등대에 앉은 새들이 문득 떠올랐다. 안톤 체호프와 푸쉬킨의 문학과 100만병의 와인이 있는 미싼드라 와이너리의 와인내음이 짙은 흑해의 숨은 진주 크림반도, 대평온에서 만난 붉은 양귀비꽃과 오랫동안 검은 바다의 유혹에 빠져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