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고재종 시인] 돌아가고, 기다리고, 함께하는 추석이어라
2018년 09월 21일(금) 00:00 가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추석만 되면 우리 국민 2000여 만 명이 고향으로 대이동을 한다는 보도를 볼 때마다 마음이 자못 흐뭇해진다. 그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돌아가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 그곳을 잊지 않고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김사인 시인의 ‘코스모스’라는 시가 있다. “누구도 핍박해 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라는 짧은 시이다.
이 시는 고향을 떠나와 ‘누구도 핍박해 본 적 없이’ 열심히, 올바로 살려고 노력했지만 늘 ‘빈 호주머니’일 수밖에 없는 객지 생활의 고달픔과 서러움을 토로한다. 한데 그 고달픔과 서러움의 수많은 일들을 ‘언제나 고향에 돌아가’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라고 묻는 데서 문득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누구도 핍박해 본 적이 없기에 오히려 무수한 핍박을 견딜 수밖에 없었을 객지 생활의 고달픔과 그 밑바닥 설움까지를 아버지 앞에서 울며 여쭐 수 있는 고향은, 그것이 우리의 근원이며 그 위안이 본원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날 10여 년을 서울·부산 등지에서 살아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밤 8시에 출발하면 이튿날 아침 6시에 도착하는 아수라장 같은 야간 완행열차를 타고 고향에 내려왔다. 먹을 게 없어 늘 새까만 보리밥과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고, 밤이면 뒤란 대숲 쓸리는 소리에 한숨과 탄식만을 솎아 내던 고향이 그래도 좋다고 기어이 내려왔던 것이다. 이는 객지 생활의 고통과 상처를 울며 내보일 수 있는 부모의 너른 품이 있었기 때문 아니던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추석 때마다 기를 쓰고 고향에 돌아오면 길가에 무죄하기 짝이 없는 코스모스가 하늘거렸다. 또 들판엔 차랑차랑 황금 물결이 넘쳐 나고, 집집마다에선 감들이 주황빛 알전등을 무수히 켜 대고 있었다. 정자나무가 늠름하게 선 동구 밖 주막에선 크나큰 돼지를 잡아 집집이 고기를 나누고, 돼지머리며 내장은 안주로 끓여서 고향에 돌아온 이들에게 소주를 권하는 큰 형님들이 있었다. 그 뜨거운 소주를 얻어 마시고 고샅길을 돌아 마침내 대문 앞에 서면, 어느새 부모님은 깨끗하게 쓸어 놓은 마당을 버선발로 가로질러 나오시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환대가 어디 있던가.
오래 전에 쓴 나의 졸시 ‘추석’은 이렇다. “창호지에 어리는/ 달빛에 몸 뒤척이다가/ 못내 설레는 가슴 마루 끝에 나서서/ 활짝 열린 사립을 넘어보다가// 사무치는 그리움/ 더욱 못 이겨/ 환한 마당 질러 동구에 나섰다가/ 동구 옆 새하얀 메밀밭 가를/ 옷고름에 눈물 적시며 온통 서성이다가// 이윽고는 타는 가슴 불나서 불나서/ 머언 신작로까지 나갔다가”로 이어지는 시이다.
이 시는 그토록 기다려도 추석에 고향에 돌아오지 않는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고통을 표현했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가슴 ‘애리도록’ 기다린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이자 그 자체로 설레고 기쁜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일찍이 객지 생활을 접고 지금은 고향 집에 정착하여 서울에 ‘유학’간 외아들을 기다리는 부모의 입장이 됐다. 이는 정녕코 기쁜 일이지만, 우리 마을엔 이미 기다림을 잊어버린 할머니들이 꽤 있으니 마음이 쓰리다.
모두 함께할 수 있다는 것
마침내 가족이 함께 모인 이 집 저 집에선 누나들의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마을 주막 마당에선 젊은이들의 윷판이 벌어지고, 밤에는 마을회관 가설무대에서 콩쿠르 대회가 열리곤 했다. 어떤 마을에선 풍물 굿이 열리고 또 어른들께 합동 세배를 올리기도 하지만, 내가 살던 마을에선 신식 문물(!)을 일찌감치 받아들여 노래자랑 대회를 열었던 것이다. 읍내에서 불러 온 악사들이 서툰 기타와 드럼을 치면 음정 이탈이 태반인 하룻밤 가수들이 ‘고향역,’ ‘타향살이’, ‘흙에 살리라’ 등의 노래를 왜장쳐 불러 댄다. 결국에는 상품으로 받은 양은 냄비며 밥솥을 두드리며 온 마을이 밤새도록 놀았다.
그렇게 즐거운 마당을 빠져나와 몇몇 친구들이 냇가에 나앉으면 티 한 점 없는 하늘에 환한 보름달이 온 누리에 은빛을 뿌려 대는 장관이란! 그 달빛에 소음과 시멘트와 먼지로 뒤범벅된 몸과 마음을 씻다 보면 이윽고 씨르래기며 귀뚜라미가 우리의 영혼을 울렸다.
하지만 추석 전날 휘잉~ 차로 와서, 추석날 새벽에 차 밀린다며 휘잉~ 떠나 버리고 마는, 요즈음 고향의 품에 남는 것은 홍삼 엑기스 박스와 기십만 원이 든 돈 봉투뿐이다. 아무리 추석 명절에 2000여 만 명의 민족 대이동이 일어난들, 이미 고향은 더 이상 마음 내려놓고 객지 생활의 일을 울며 아버지께 여쭐 곳이 아니니,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추석만 되면 우리 국민 2000여 만 명이 고향으로 대이동을 한다는 보도를 볼 때마다 마음이 자못 흐뭇해진다. 그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돌아가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 그곳을 잊지 않고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김사인 시인의 ‘코스모스’라는 시가 있다. “누구도 핍박해 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라는 짧은 시이다.
젊은 날 10여 년을 서울·부산 등지에서 살아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밤 8시에 출발하면 이튿날 아침 6시에 도착하는 아수라장 같은 야간 완행열차를 타고 고향에 내려왔다. 먹을 게 없어 늘 새까만 보리밥과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고, 밤이면 뒤란 대숲 쓸리는 소리에 한숨과 탄식만을 솎아 내던 고향이 그래도 좋다고 기어이 내려왔던 것이다. 이는 객지 생활의 고통과 상처를 울며 내보일 수 있는 부모의 너른 품이 있었기 때문 아니던가.
오래 전에 쓴 나의 졸시 ‘추석’은 이렇다. “창호지에 어리는/ 달빛에 몸 뒤척이다가/ 못내 설레는 가슴 마루 끝에 나서서/ 활짝 열린 사립을 넘어보다가// 사무치는 그리움/ 더욱 못 이겨/ 환한 마당 질러 동구에 나섰다가/ 동구 옆 새하얀 메밀밭 가를/ 옷고름에 눈물 적시며 온통 서성이다가// 이윽고는 타는 가슴 불나서 불나서/ 머언 신작로까지 나갔다가”로 이어지는 시이다.
이 시는 그토록 기다려도 추석에 고향에 돌아오지 않는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고통을 표현했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가슴 ‘애리도록’ 기다린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이자 그 자체로 설레고 기쁜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일찍이 객지 생활을 접고 지금은 고향 집에 정착하여 서울에 ‘유학’간 외아들을 기다리는 부모의 입장이 됐다. 이는 정녕코 기쁜 일이지만, 우리 마을엔 이미 기다림을 잊어버린 할머니들이 꽤 있으니 마음이 쓰리다.
모두 함께할 수 있다는 것
마침내 가족이 함께 모인 이 집 저 집에선 누나들의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마을 주막 마당에선 젊은이들의 윷판이 벌어지고, 밤에는 마을회관 가설무대에서 콩쿠르 대회가 열리곤 했다. 어떤 마을에선 풍물 굿이 열리고 또 어른들께 합동 세배를 올리기도 하지만, 내가 살던 마을에선 신식 문물(!)을 일찌감치 받아들여 노래자랑 대회를 열었던 것이다. 읍내에서 불러 온 악사들이 서툰 기타와 드럼을 치면 음정 이탈이 태반인 하룻밤 가수들이 ‘고향역,’ ‘타향살이’, ‘흙에 살리라’ 등의 노래를 왜장쳐 불러 댄다. 결국에는 상품으로 받은 양은 냄비며 밥솥을 두드리며 온 마을이 밤새도록 놀았다.
그렇게 즐거운 마당을 빠져나와 몇몇 친구들이 냇가에 나앉으면 티 한 점 없는 하늘에 환한 보름달이 온 누리에 은빛을 뿌려 대는 장관이란! 그 달빛에 소음과 시멘트와 먼지로 뒤범벅된 몸과 마음을 씻다 보면 이윽고 씨르래기며 귀뚜라미가 우리의 영혼을 울렸다.
하지만 추석 전날 휘잉~ 차로 와서, 추석날 새벽에 차 밀린다며 휘잉~ 떠나 버리고 마는, 요즈음 고향의 품에 남는 것은 홍삼 엑기스 박스와 기십만 원이 든 돈 봉투뿐이다. 아무리 추석 명절에 2000여 만 명의 민족 대이동이 일어난들, 이미 고향은 더 이상 마음 내려놓고 객지 생활의 일을 울며 아버지께 여쭐 곳이 아니니,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