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을 만났다. 촛불항쟁으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 이야기를 하던 중 그는 “지난 9년이 너무나 답답하고 무력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지방자치가 있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역사가 후퇴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복지를 지킨 보루가 지방자치라는 게 이유였다.

필자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지방의회는 1991년, 단체장 직선은 1995년 이뤄졌다. 지방의회를 기준 삼으면 우리 지방자치는 26살 성년으로 성장했다. ‘경험이 없다’ ‘시민의식 수준이 받쳐주지 못한다’는 시행 초기 우려를 보기 좋게 지우며 우리 지방자치는 대체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장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역설적으로 지방자치 중요성을 일깨웠다. 그것은 참여와 자치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10년 세월 동안 우리는 민주주의, 평화, 복지와 같은 가치를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다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이 들어설 때만 해도 큰 염려는 하지 않았다.

결국,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정권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제멋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봤다. 혈세 수십조 원을 강에 퍼붓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헌법이 보장한 양심의 자유를 탄압했다.

민주주의와 법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우리는 최고 권력자 한 명의 ‘선한 의지’에만 나라의 운명을 맡겼던 것이다. 권력자의 ‘선한 의지’는 너무나 불명확하다. 선출직 권력자들이 모두 선한 의지를 갖고 있을 리 만무하고, 그 의지에만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도 문제가 크다. 결국, 시스템의 문제다. 선한 의지에 기대지 않고, 권력자가 선한 방향으로 일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지방자치는 이 시스템을 세울 최적의 장소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후퇴한 민주주의, 인권, 복지를 지역에서 되살린 사례가 많다는 것이 지방자치와 시스템의 관계를 입증한다. 학교 무상급식,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민관 공동복지망은 이제 우리 사회의 대세가 됐다. 지방자치가 일군 정책들이 우리 사회의 퇴보를 막을 시스템으로 당당히 서 있다.

지난 겨울을 지나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 시스템을 더욱 굳건히 마련할 좋은 조건을 우리는 만났다. 그 조건은 바로 ‘촛불항쟁’이다. 민주공화국에서 봉건 왕조 시대의 불법이 자행됐지만 시민들이 촛불로 바로 잡았다. 촛불시민의 요구는 민주주의 확립, 자치분권으로 권력 사유화 방지, 기울어진 운동장의 복구 등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이 요구의 실현은 국가단위에서도 가능하지만, 지역에서 뿌리내려 다른 지역으로 확산하는 것이 효율과 속도 측면에서 좋다고 본다.

지인의 말처럼 지방자치는 우리 사회가 보다 좋은 미래로 나아가도록 뒷받침하는 동력이다. 중요한 것은 지방자치가 선한 방향으로 가도록 강제하는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은 참여에 있다. 행정, 그리고 일상에서 주민들이 참여하고 목소리를 낼 때 비로소 지방자치는 지속가능한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미 주민들은 훌륭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주민이 이웃과 갈등을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전국 최초의 마을분쟁 해결센터를 운영하고, 모바일 투표로 현안을 결정, 복지 호민관 제도를 동별로 운영해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광주 남구의 사례로 보듯 지방자치 역량은 나날이 성장 중이다.

이와 함께 정책 옴부즈맨, 주민참여 예산제 업그레이드, 동장 주민선출제, 공무원 인사 주요 보직 직원 투표, 민관 공동복지망, 중간 지원 조직 등 우수 사례를 도입해 전국의 보편 정책으로 삼아야 한다.

핵심은 지방자치를 관치의 시대에서 주민자치의 시대로 개편하자는 것이다. 단순히 주민 의견 수렴 차원에 머무르면 안 된다. 행정에 주민이 직접 참가하도록 법(조례)과 제도로 보장하고, 주민들의 자치활동을 전폭 지원해야 한다. 지역을 관청이 경영하는 시대는 지났다. 관청과 주민이 대등한 입장에서 행정력과 예산 사용처를 결정하고 함께 집행하는 수준의 거버넌스를 꾸려야 한다. 선출직의 선한 의지에 기대는 게 아니라, 그 선출자가 선한 방향으로 권한을 쓰도록 ‘강제’하는 시스템이 뿌리내릴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퇴행 걱정 없이 진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