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틀별기고-리명한 소설가] 가을밤의 세레나데
2017년 09월 29일(금) 00:00 가가
초록빛 골짜기로 선들바람이 스며들면 산천은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꾸어 가며 황금빛으로 물들어 갔다. 여름 내내 논밭에서 땀을 흘렸던 농군들은 너나없이 수확을 기대하는 뿌듯한 충족감에 젖어 있겠지만 희망을 담아야 할 주머니조차 갖지 못한 벌거숭이들은 허전함을 안고 광야에 내던져져 허우적거렸다.
T.S 엘리엇은 그의 장시 ‘황무지’에서 겨울 동안의 혹심한 추위로 얼어붙었던 대지의 살갗을 뚫고 싹트는 라일락의 발아 과정을 잔인한 아픔으로 표현하였는데, 그가 이런 역설을 토해 낸 것은 4년 전에 겪었던 참담한 일차대전의 트라우마 때문이었으니, 전쟁이라는 범죄적 발작이 얼마나 인간의 감성과 인식의 본질까지를 망가뜨려 버리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엘리엇은 위험한 역사의 폭약을 싣고 궤도를 일탈한 장갑열차가 전통의 성곽을 박살내고 지나간 황막한 폐허에서 상처를 입고 방황했던 보헤미안이었다.
그렇다고 그들만이 그런 비극을 겪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일찍부터 대륙으로부터의 침략에 이어 섬나라의 반복되는 침공과 약탈로 온 국토가 황폐화되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고 20세기 후반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희생을 겪어야 했는데 오늘에 와서 여진은 더욱 거세지고 불안이 가중되고 있는 가운데, 국제 깡패들의 불장난이 이어지고 있으니 편안하게 잠들 시간이 없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울적하고 불안할 때마다 버스를 타고 능주역 근처로 달려가 들판 끝 나지막한 산 위에서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심중의 티끌을 씻어 내곤 했는데 어렸을 적 시골에서 만난 보름달로부터 받은 영감 때문이었다. 중추절의 보름달은 울적할 때마다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나의 마음을 달래 주곤 했었는데, 그랬던 달은 나중에 아가씨들의 율동과 만남으로써 흥겨움과 신비성을 더해 가며 나를 끌어들였었다.
추석날의 정경들은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찬란한 파노라마로 되살아나 굳어 가는 나의 가슴을 녹여 주고 있지만, 강강술래의 하이라이트는 노래를 합창하며 마당을 돌았던 원무였다. 휘영청 둥근달을 머리 위에 받들고 성숙한 처자들과 새댁들이 장단에 맞추며 마당을 돌기 시작하면, 대여섯 나이였던 나는 환성을 지르며 군무 속으로 뛰어들어 토끼뜀질을 하곤 했었는데, 그들 중에서 나를 가장 귀여워해 주었던 것은 납술이라는 이름의 이웃집 누나였다. 얼굴이 달덩이 같았던 그녀가 분홍빛 댕기로 짠 탐스러운 변발을 출렁이며 뛰기 시작하면 주술에 걸린 것처럼 뛰어나가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었었는데, 허무한지고!
어느 날엔가 나는 동네 앞으로 나갔다가 그렇게 좋아했던 누나가 며칠 전에 일본에 있는 숙부를 찾아 마을을 떠나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애절하게도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열아홉 살 소년이랄수 있는 아버지를 잃고 늙은 조부모 그늘에서 살고 있던 그녀였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얼마나 서운하고 슬펐던지 저녁때가 되면 동네 앞으로 나와 그 집 앞을 맴돌다가 돌아갈 때면 주르륵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곤 했었다.
그러고 나서 5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일본 땅을 밟게 되어 도쿄의 미다카(三鷹)에 살고 있다는 그녀에게 기별을 했더니 연록색 저고리에 분홍치마 차림으로 예쁜 며느리와 같이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을 찾아 왔었다. 상대가 편할 듯싶어 일본어로 말을 걸었더니 아랑곳없이 우리말로 대꾸하며 조국의 분단을 걱정해 주었는데 대화의 과정에서 나를 감동케 한 것은 1세기 가까이 일본 땅에 살아왔으면서도 결코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의연함이었다. 일본어를 꺼낸 것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강강술래 말이에요. 너무 즐겁고 흥겨웠었는데, 그 때를 기억하고 계셔요?”
“기억하다 뿐이겠는가? 가슴 속에 이렇게 살아 있는데…자네가 내 뒤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댕기를 잡아당기고 해서 콱 한번 때려 줄라다가 허허허….”
어깨를 들먹거리는 자세가 금방이라도 일어서서 술래춤을 출 것만 같았다.
“얼굴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가 왜 이리 그리울까?”
갑자기 팔십 년 전에 가신 아버지를 거론하는 그녀의 얼굴이 숙연해졌다. 처녀 적 그녀의 이름은 뜻풀이가 어려운 납술이었는데 호적에는 김유순(金遺順)이었다. 유복녀였기에 할아버지가 붙여 등재해준 이름이었다.
“그러시겠지요.”
그녀의 눈에 물기가 서린 것을 본 나의 눈시울이 덩달아 뜨거워졌다. 애절한 슬픔은 공감하고 공유할수록 아리따운 것. 옥순이, 용덕이, 딸그만이, 공례…. 함께 자라며 뛰놀았던 친구들의 이름을 대다가 거의가 세상을 떠나 버린 것을 알게 되자 민망스러움에 대화는 중단되고 말았다.
오래오래 사시기를 부탁하며 손을 잡고 흔들다가 헤어졌는데 슬프게도 작년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들려왔다. 오랜 세월 마음속에 간직해 왔던 동심의 동산이 허물어져 나가는 아픔이었다. 아름다운 추억은 이렇게 해서 하나둘 나의 가슴을 떠나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있는데, 어느 집에서인지 기타 줄에 실린 세레나데가 창을 넘어 아련하게 건너와 가슴속을 적셔 준다.
T.S 엘리엇은 그의 장시 ‘황무지’에서 겨울 동안의 혹심한 추위로 얼어붙었던 대지의 살갗을 뚫고 싹트는 라일락의 발아 과정을 잔인한 아픔으로 표현하였는데, 그가 이런 역설을 토해 낸 것은 4년 전에 겪었던 참담한 일차대전의 트라우마 때문이었으니, 전쟁이라는 범죄적 발작이 얼마나 인간의 감성과 인식의 본질까지를 망가뜨려 버리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엘리엇은 위험한 역사의 폭약을 싣고 궤도를 일탈한 장갑열차가 전통의 성곽을 박살내고 지나간 황막한 폐허에서 상처를 입고 방황했던 보헤미안이었다.
어느 날엔가 나는 동네 앞으로 나갔다가 그렇게 좋아했던 누나가 며칠 전에 일본에 있는 숙부를 찾아 마을을 떠나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애절하게도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열아홉 살 소년이랄수 있는 아버지를 잃고 늙은 조부모 그늘에서 살고 있던 그녀였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얼마나 서운하고 슬펐던지 저녁때가 되면 동네 앞으로 나와 그 집 앞을 맴돌다가 돌아갈 때면 주르륵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곤 했었다.
그러고 나서 5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일본 땅을 밟게 되어 도쿄의 미다카(三鷹)에 살고 있다는 그녀에게 기별을 했더니 연록색 저고리에 분홍치마 차림으로 예쁜 며느리와 같이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을 찾아 왔었다. 상대가 편할 듯싶어 일본어로 말을 걸었더니 아랑곳없이 우리말로 대꾸하며 조국의 분단을 걱정해 주었는데 대화의 과정에서 나를 감동케 한 것은 1세기 가까이 일본 땅에 살아왔으면서도 결코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의연함이었다. 일본어를 꺼낸 것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강강술래 말이에요. 너무 즐겁고 흥겨웠었는데, 그 때를 기억하고 계셔요?”
“기억하다 뿐이겠는가? 가슴 속에 이렇게 살아 있는데…자네가 내 뒤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댕기를 잡아당기고 해서 콱 한번 때려 줄라다가 허허허….”
어깨를 들먹거리는 자세가 금방이라도 일어서서 술래춤을 출 것만 같았다.
“얼굴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가 왜 이리 그리울까?”
갑자기 팔십 년 전에 가신 아버지를 거론하는 그녀의 얼굴이 숙연해졌다. 처녀 적 그녀의 이름은 뜻풀이가 어려운 납술이었는데 호적에는 김유순(金遺順)이었다. 유복녀였기에 할아버지가 붙여 등재해준 이름이었다.
“그러시겠지요.”
그녀의 눈에 물기가 서린 것을 본 나의 눈시울이 덩달아 뜨거워졌다. 애절한 슬픔은 공감하고 공유할수록 아리따운 것. 옥순이, 용덕이, 딸그만이, 공례…. 함께 자라며 뛰놀았던 친구들의 이름을 대다가 거의가 세상을 떠나 버린 것을 알게 되자 민망스러움에 대화는 중단되고 말았다.
오래오래 사시기를 부탁하며 손을 잡고 흔들다가 헤어졌는데 슬프게도 작년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들려왔다. 오랜 세월 마음속에 간직해 왔던 동심의 동산이 허물어져 나가는 아픔이었다. 아름다운 추억은 이렇게 해서 하나둘 나의 가슴을 떠나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있는데, 어느 집에서인지 기타 줄에 실린 세레나데가 창을 넘어 아련하게 건너와 가슴속을 적셔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