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와 폭염… 이래저래 힘든 7월 한여름 날씨다. 며칠 연속 끊임없이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가 싶더니 땡볕이 대지를 지글지글 달군다. 남쪽에 머물며 비를 퍼붓던 장마전선은 다시 북상했다.

짙은 먹구름에 간헐적으로 소낙비가 쏟아지던 날, 변덕스런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꽃대를 곧추세우는 연꽃을 찾아 우중(雨中) 연꽃여행에 나선다. 옛 백제 왕도인 충남 부여 궁남지(宮南池)다.

◇백제 무왕탄생설화 얽힌 궁남지=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위치한 궁남지(사적 135호)는 백제시대의 연못으로, 백제 무왕의 탄생설화와 연관돼 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무왕 조에 “그의 어머니가 과부가 돼 서울 남지변(南池邊)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못에 사는 용과 정을 통해 장(무왕의 이름)을 낳고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고 한다”고 실려있다.

장마철이지만 궁남지 주차장은 많은 차량으로 북적거렸다. 이전에는 궁남지를 찾아 역사 속으로 스러져간 옛 백제의 흔적을 찾았다면, 요즘 궁남지에서는 다양한 연꽃들을 음미할 수 있다. 궁남지 주변 습지 10만여평에 조성된 연밭에 다채로운 연꽃들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주차장에서 궁남지로 들어서면 우선 홍련(紅蓮)이 반긴다. 수련과 여러해살이 풀인 연(蓮)은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청결하고 고귀한 인상, 세속을 초월한 깨달은 경지를 연상하게 한다. 불교에서도 연꽃은 상징적이다. 연꽃의 봉우리는 청정을, 활짝 핀 꽃은 기쁨과 성불을, 연밥이 드러난 지는 꽃은 진리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곳 연밭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부여군 한 공무원이 지난 2001년부터 12년간 돌탑을 쌓듯 연을 하나 둘 심기 시작해 ‘연꽃 세상’으로 거듭났다. 홍련뿐만 아니라 적홍련, 미니 홍련, 백련, 진백련, 황금련, 가시연, 백수련 등 50여종 1000만여 송이가 꽃을 피운다. 초록빛 연잎이 연출하는 끝없는 초록의 바다에 붉고, 하얀 연꽃들의 향연(饗宴)이다.

궁남지 연꽃을 알게 됐을 때 꼭 찾아보고 싶은 것은 멸종위기 식물로 지정된 가시연과 대하연(大賀蓮), 빅토리아(victoria) 연이었다. 하지만 이들 연은 아직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아 못내 아쉬웠다.

가시연은 연잎이 쭈글쭈글한 것이 특징이다. 대하연은 연꽃 애호가들 사이에서 ‘전설의 연꽃’으로 알려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꽃이다.

1951년 일본 도쿄대학 운동장 유적지에서 발굴된 연씨 3개를 식물학자 오오가 이치로(大賀一郞) 박사가 그중 한 개를 발아시키는 데 성공하며 2000년 만에 깊은 잠에서 깨어난 연꽃이다. 이를 통해 연씨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종자의 생명력을 지닌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또 빅토리아 연은 1980년 남아메리카에서 발견돼 세상에 알려졌다. 연잎이 1∼1.8m까지 거대하게 자라기 때문에 25∼35㎏의 어린이가 올라가도 가라앉지 않는다. 특히 한밤중에만 왕관모양의 꽃을 피운다고 한다. 궁남지에 있는 빅토리아 연은 쟁반 정도 크기이다. 많은 사진 애호가들이 이곳을 찾아 작품활동에 열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연꽃 50여 종 1천만 송이 개화=하염없는 연꽃밭을 거닐며 떠오르는 시구는 서정주(1915∼2000) 시인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연꽃 / 만나러 가는/바람 아니라/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고교시절, 연꽃으로 유명한 전주 덕진 연못가에서 교내 백일장이 열렸을 때의 일이다. 대부분 학생이 그럴싸한 시구를 고심하고 있을 때 지금은 의사로 활동하는 한 친구는 이렇게 썼다. “호수는 H20다.”

서울에서 세 자매가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는 황미숙(47)씨는 “만개한 연꽃을 보니 너무 예쁘고,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후두둑, 연잎에 물방울이 튀는 듯 싶다가 비가 쏟아진다. 잠시 비로 인해 발걸음을 멈추자 색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오목한 연잎에 빗물이 고이다가 연 줄기가 기우뚱 기울며 바로 옆의 연잎에 빗물을 비우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빗물이 다시 고이면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모습은 실로폰 멜로디가 들리는 듯한 생생한 자연의 음악이다.

장맛비 속에서 연꽃잎을 바라보며 머릿속을, 가슴속을 말끔히 비운다.

한편 부여군은 18일부터 21일까지 나흘간 궁남지 일원에서 ‘제11회 부여 서동연꽃 축제’를 개최한다.

/글·사진=송기동기자 song@kwangju.co.kr

여행정보

광주에서 충남 부여를 가려면 서해안 고속도로와 서천∼공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서부여 IC에서 빠진 후 부여대교를 건너 부여교차로에서 좌회전한다.

광주에서 궁남지까지는 160여㎞, 1시간 30분∼2시간이 소요된다.

궁남지 연꽃밭이 워낙 넓기 때문에 관광안내소에 비치된 ‘서동공원으로 떠나는 연꽃여행’ 지도를 챙겨 보물찾기하듯 특정 연꽃을 찾아보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