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다. 대학시절, 이맘때면 선친은 “녹음방초지절(綠陰芳草之節)에…”로 시작하는 엽서를 보내곤 하셨다. 꽃이 진 자리에 녹음이 짙어지고, 이른 무더위가 시작되는 이 즈음에 객지에서 공부하는 자식의 건강을 염려하는 애틋한 부정(父情)이 푸른 만년필 잉크 속에 배어있었다.

어느새 일년의 절반이 흐른 시간, 수은주는 이미 30도를 웃도는 여름날씨에 접어 든지 오래다. 벌써 느티나무 그늘밑 산들바람이 그리워지는 이 즈음, 뜨거운 가슴을 식혀줄 폭포를 찾아 길을 떠난다.

◇백두대간, 상주 장각폭포=속리산 최고봉인 천황봉(해발 1058m)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경북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동 계곡을 굽이쳐 흐르다 6m 높이의 절벽을 타고 시원스럽게 떨어진다. 바로 장각폭포이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용소(龍沼)는 금방이라도 용이 치솟아 오를 것 같이 짙푸르지만 물가는 투명하기 그지없다.

폭포 옆에는 선경(仙景)에 화룡점정이라 할 만한 ‘금란정’(金蘭亭)이 자리하고 있다. 금란은 ‘쇠보다 견고하고, 난초보다 향기롭다’는 뜻이다. 매우 친밀한 사귐이나 두터운 우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역경’(易經)의 ‘계사’(繫辭)에 나오는 말이라 한다.

이곳 정자에 ‘금란정’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붙은 까닭은 상오리 위, 아랫마을에 살던 정운상·배석봉·남상흠·김호인·김팔홍·노재덕 등 12명의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정자를 세운 미담 덕분이다.

정자옆 금란정 기념비에는 건립과정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열두 분이 오래 이어온 순수한 금란의 우의를 더욱 돈독히 하고자 금란정이라 이름지었다. 대추나무를 깎아 여섯 개 기둥을 세우고, 잣나무를 다듬어 대들보를 올렸으며, 소나무 서까래를 걸쳐 흙으로 빚어 가마에서 구워낸 옛적 기와를 이고 송판으로 마루를 깔아 넓이가 두어 칸으로 1962년 봄에 준공하였다.…”

금란정이 없다면 폭포는 그저 흔한 풍경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장각폭포와 금란정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더도 덜도 말게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 영화 ‘낭만자객’과 사극 ‘무인시대’ 등의 촬영지로 각광을 받았다.

◇선계(仙界) 방불케 하는 영동 옥계폭포=충북 맨 끝자락에 자리해 전라도와 경상도를 접하고 있는 영동은 곶감으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난계 박연(1378∼1458) 선생의 고향인 국악의 고장이기도 하다. 박연 선생은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악성으로 불리는 조선시대 음악가이다.

충북 영동군 심천면 마곡리에 위치한 옥계폭포는 박연선생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어느날 옥계폭포를 찾은 박연 선생은 폭포수 밑에서 피리를 연주할 때 바위틈에 피어난 난초에 매료돼 자신의 호를 난계(蘭溪)라고 지었다고 한다.

폭포높이는 20여m. 옛 조상들은 옥계폭포를 음폭(陰瀑), 즉 여자폭포라 해석했다.

당초 폭포가 내리꽂히는 웅덩이 안에 우뚝 솟은 양바위가 있었다 한다. 그런데 양바위가 폭포의 경관을 해친다 생각한 마을사람들이 이를 멀리 옮겨 버렸다. 그러자 이때부터 마을에 안 좋은 일이 빈발했다. 결국 마을사람들은 마을의 잇따른 흉사(凶事)가 양바위를 옮겨 벌어진 일이라고 판단해 다시 양바위를 제자리에 옮겼다. 이후 음폭과 양바위가 음양의 조화를 이루자 다시 마을이 평온해졌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를 보는 것만으로도 초여름의 더위는 한발짝 물러난다. 폭포옆 호젓한 팔각정에서 경북 김천 출신 문태준 시인의 시집을 펼쳐 읽는다.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꽃진 자리에’ 전문)

/글·사진=송기동기자 song@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