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 하늘, 파란 바다, 그사이 초록섬 하나.

해발고도 20m.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물 위에 방석 하나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키 작은 섬 가파도를 찾아 떠났다.

모슬포항에서 배를 타고 15분. 채 멀미를 느끼기도 전에 초록섬이 얼굴을 들이민다. 제주도와 섬을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여객선은 성수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하루 네 번 운항하는데 거센 물길이 지나는 길목이라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출항하지 않아 때를 잘 맞춰야 한다.

강태공들이 조용히 찾던 가파도를 주목하기 시작한 건 2009년 4월 청보리 축제가 열리고서부터. 4월 초순부터 5월 초순까지 이어지는 축제는 올해로 5년째. 하루 방문객만 15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축제가 한창인 4월말 찾은 가파도는 온통 푸르다. 17만여평을 가득 메운 보리가 물결치듯 다가와 바람인사를 한다. 섬 면적의 70%에 이르는 가파도 보리는 ‘향맥’이라는 제주 재래종으로 일반 보리보다 키가 큰 게 특징이다.

상동마을에서 하동마을로 곧장 이어지는 가파도 중앙길은 산 하나 언덕 하나 없는 평지에 온통 보리밭뿐이다. 특히 요즘 가파도 청보리밭은 밭이나 무덤가에 흐드러지게 피어오른 갯무꽃이 돌담과 어울려 운치를 더한다.

길게 펼쳐진 보리바다. 어디까지가 보리밭인지 어디서부터가 바다인지…. 지평선과 수평선이 맞닿은 코발트빛 바다 너머 산방산, 송악산, 수월봉, 한라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풍경은 가슴 가득 청량감을 선물한다.

‘보리밭 사잇길로’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지는 길을 걷다보니 보리 피리를 물던 유년시절이 기억에서 나와 마주한다. 시골에서 자랐거나 대학 농촌 봉사활동을 경험한 세대라면 보리 피리에 대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보리대를 뽑아 끝을 살짝 깨문 뒤 불면 ‘삐∼’ 하고 소리가 난다. 성공률이 낮은 보리 피리는 ‘불었다’ 보다는 ‘물었다’는 기억이 더 많은 귀여운 추억이다. 지금은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나 나올 법한 풍경이 돼버렸지만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기억에 어느새 마음은 아련한 향수에 젖는다.

가파도는 모슬포에서 남쪽으로 5.5km. 해안선을 따라 산책을 나서면 두 시간 여 만에 다시 출발지로 돌아올 만큼 작고 아담한 섬이다. 1653년 가파도에 표류했던 네덜란드 선박 스페르웨르호. 그 안에 타고 있었던 선원 헨드릭 하멜이 ‘화란선 제주도 난파기’와 ‘조선국기’를 저술해 우리나라가 서양에 처음 소개된 계기가 된 곳이기도 하다.

가파도는 제주를 가장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조망 포인트로도 꼽힌다. 상동과 하동 두 개의 마을이 있고 해안 일주도로와 마을 중심을 가르는 두 개의 큰 길이 있는데 특히 송악산과 한라산으로 펼쳐진 전망은 압권이다.

천생 바다를 업으로 삼아야 하는 섬마을인지라 아낙들은 아직도 마을 할망당과 제단에서 가족의 생계와 안전을 위한 기원을 한다.

선사시대 이후부터 그곳에 올라서면 폭풍이 몰아친다 해 지금까지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는 ‘까메기 동산’도 흥미롭다. 마을 앞 해안에는 ‘고망물’이라는 샘물이 있는데 제주 유인도(추자·우도·비양·마라·가파) 중 유일하게 용천수가 솟아나 옛부터 물 걱정 없는 섬으로도 알려졌다.

가파도에서 보면 북쪽으로는 한라산이, 남쪽으로는 마라도가 선명하다. 가파도와 마라도는 아주 가까운 이웃 섬이다. 그래서 섬사람들끼리 돈을 빌리면 갚아도(가파도) 좋고 말아도(마라도) 좋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겨났다고 한다.

올레길 10-1 코스이기도 한 가파도는 어느 길을 택해 걸어도 좋다. 이곳 저곳을 가기보다 한곳에 오래 서서 응시할수록 아름다움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아멩 고라도 왕 봐사 알주, 그거 어떵 알아게…’

이 말은 제주 방언으로 ‘아무리 말해도 와서 봐야 안다’는 뜻이란다. 그렇다. 백문이 불여일견. 지금 떠나도 좋고 잠시 미뤄도 좋다. 푸르른 청보리가 노랗게 익어도 가파도 보리밭은 언제나 너른 가슴으로 반겨줄 것이다.

회색빛 일상에 푸른 점 하나 찍고 싶다면 따사로운 봄 햇살과 바람, 어린 시절 향수가 가득한 가파도로 떠나보자. 이 봄이 가기 전에.

▶/가파도중앙=임수영기자 swim@kwangju.co.kr

<사진제공=중앙김철홍 ‘이 제주 날마다 소풍’ 블로그 운영>



* 여행수첩

제주도 모슬포 항에서 하루 네번 여객선이 운항된다. 평일 오전 9시, 11시, 오후 2시, 4시에 출발. 왕복 배삯은 성인·청소년 1만원. 어린이 5000원.

날씨가 나쁘면 배가 뜨지 않는 경우가 있어 미리 문의(삼영해운 064-794-5490) 해야 한다.

‘해녀촌’, ‘바다별장’, ‘올레길 식당’, ‘춘자네 식당’, ‘가파도 민박’, ‘블루펜션’ 등은 민박과 식당을 겸한다.

특히 어촌계 해녀들이 직영하는 ‘해녀촌’ 용궁정식과 해물정식은 유명하다.

TV 예능 프로그램 ‘1박2일’에 소개돼 더 유명세를 탄 정식은 해녀들이 갓 잡아온 자연산 문어, 소라, 전복 등을 통째로 냄비에 끓여낸다. 18가지 반찬에 가격은 더할나위 없이 착한 1인분 1만원.

성게 칼국수, 보말 칼국수도 별미다.



※ 가파도 선착장에서는 오후 4시까지 자전거도 대여할 수 있다. 커플용 8000원, 1인용 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