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백암산 '들꽃 여행'

어느새 봄이다. 누군가 제주도와 서울의 개화시기와 거리를 따져보고서 봄이 오는 속도가 시속 900m정도라고 계산했다. 어린아이 걸음 정도의 속도로 ‘산너머 남촌에서’ 봄은 북상하는 셈이다.

우리말 봄은 ‘볕’(陽)을 의미하는 고어 ‘

◇겨울바람 속에서 피는 들꽃=백암산 야생화는 된바람(北風)이 채가시지 않은 2월 20일께부터 돋아난다. 봄의 전령이라 하는 복수초(福壽草)보다 앞서 ‘변산 바람꽃’이 핀다. 이어 ‘꿩의 바람꽃’, ‘붉은 대극’, ‘현호색’, ‘얼레지’, ‘산자고’, ‘털괭이눈’, ‘피나물’, ‘애기 괭이눈’ 등이 차례대로 핀다. 손가락 2∼3마디 정도의 자그마한 바람꽃의 이름은 약한 바람에도 심하게 떠는 특성에서 유래했다. 바삐 산행하다 보면 무심히 지나쳐버릴 만큼 자그마한 크기로, 발견장소에 따라 ‘변산’과 ‘만주’가 붙었다. 눈 밝은 조상님들은 야생화의 특성을 잘도 살펴 이름을 재치있게도 붙였다.

10일 백양사 입구에 차를 두고 천진암 생태탐방로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꿩의 바람꽃’, ‘붉은 대극’, ‘자주괴불주머니’,‘털괭이눈’, ‘현호색’, ‘피나물’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만발한 벚꽃을 시샘하듯 잠시나마 서설(瑞雪)이 내리자 꽃들이 일제히 꽃잎을 오무려 버려 아쉬움을 남겼다.

발길을 멈추고 쪼그리고 앉아 바라본 ‘꿩의 바람꽃’에게서 돌틈에서 겨울의 모진 추위를 이겨낸 생명의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2주 전에 왔을때 본 ‘얼레지’ 생김새는 바람꽃에 비하면 귀족적이랄까? 꽃대에 곧추선 6개의 길쭉한 분홍빛깔 꽃잎이 팔랑개비처럼 활짝 펼쳐져 봄 햇살을 한껏 안는 모양세다. 녹색바탕에 자주색 무늬가 있는 큼직한 이파리가 이색적이다. 돌연변이종인 하얀 얼레지도 눈길을 끈다.

그에 비하면 할미꽃은 수수하다. 하얀 솜털로 뒤덮인 모양세 탓에 노고초(老姑草)·백두옹(白頭翁)으로도 불리는 할미꽃은 손녀의 집을 눈앞에 두고 쓰러져 죽은 할머니의 넋이 산골짜기에 핀 꽃이라는 슬픈 전설을 품고 있다.

더욱이 야생화는 아무렇게나 피는 것이 아니란다. 수필가 장돈식은 ‘빈산엔 노랑꽃’이라는 글에서 오랜 시간 동안 야생화를 관찰한 결과를 이렇게 적었다.

“아직 신록이 피기 전, 메마른 배경일 때 멀리 있는 벌과 나비들의 눈에 띄기 쉬운 색이 노란색임을 식물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겨울의 시작과 끝에는 노랑꽃만 핀다. 민들레도, 냉이도 이른 계절의 꽃은 모두 노란색이라는 걸 자세히 관찰한 이들은 알 것이다. …이른 봄과 늦가을 눈으로 얼룩진 산에는 노란색이 주류이고, 봄 가을은 붉은 꽃, 청산에 피는 꽃은 희다…”

◇벌들을 유인해 수정하기 위해 꽃 피워=‘아하!’라는 감탄사가 자연히 나올 만큼 간단명료하게 자연의 이치를 꿰뚫은 문구다. 산자락에서 서둘러 봄을 알리는 생강나무꽃이 노랗고, 온산을 물들이는 진달래와 철쭉이 붉은 것은 모두 벌을 유인해 수정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벌들이 활짝 핀 꽃들을 차례차례 부지런히 방문하다 보면 벌들은 꿀을 모으고, 꽃들은 2세를 온전히 남길 수 있게 되니 자연의 조화로움을 보이지 않게 치밀하게 프로그래밍한 조물주에 외경심(畏敬心)을 절로 느끼게 한다.

백암산은 ‘백양 더부살이’와 ‘진노랑 상사화’, ‘노랑 붓꽃’ 등 760여 종의 자생식물이 서식하는 곳이다. 20여년간 야생화를 꾸준히 촬영해온 국립공원관리공단 내장산 백암산사무소(소장 김종달) 박성배 행정과장은 “야생화 탐방과 촬영시 자생지 보호에 신경써야 한다. 개화기에 서식지를 발로 밟아 버리면 답압(踏壓)때문에 꽃들이 채 피기도 전에 죽어버린다”며 “얼레지의 경우 씨가 땅에 떨어져 꽃이 피려면 5∼6년이 걸린다. 희귀식물이 예쁘다고 캐간다 해도 개화기간이 짧고 실내에서 키울 수 없다. 서식지에서 자연 그대로 보전하려는 등산객들의 의식변화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백암산 기슭의 야생화를 하나하나 살핀 후 경내로 들어서면 만개한 고불매(古佛梅)가 반긴다. 봄 햇살아래 진한 매향(梅香)을 음미하노라면 어느새 봄기운은 성큼 내 맘속까지 깃든다.

/글·사진=송기동기자 song@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