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겨울 사이 한라산은 변신의 귀재다.

산 아래는 단풍이 물든 가을이고, 정상에 가까워지면 얼음꽃이 만발한 겨울이다. 또 늘 안개와 구름에 뒤덮여 있다. 기온이 낮은 겨울엔 구름이나 안개가 눈으로 돌변하고, 바람까지 더하면 눈보라가 불어닥쳐 한치 앞을 볼 수 없다.

한라산 산행은 이래서 즐겁다. 명심할 건, 변화무쌍한 날씨를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

백록담에 오르는 길은 성판악과 관음사 두 코스 뿐이다. 어리목이나 영실 코스는 윗세오름대피소까지만 오를 수 있을 뿐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는 막혀 있다.

한라산 절경을 제대로 맛보려면 성판악코스(9.6㎞)로 올라 관음사코스(8.7㎞)로 내려오는 게 좋다. 8시간가량 걸린다. 정상을 앞둔 진달래밭대피소를 낮 12시까지 통과해야 백록담에 갈 수 있다.

지난 7일 아침 8시 성판악휴게소 광장. 제주도로 연수 온 대한건설협회 전남도회 회원 70여명과 남한 최고봉 한라산 산행에 나섰다.

해발 750m 높이의 성판악휴게소에서 등산로로 발걸음을 옮기면 곧바로 숲 속이다. 졸참나무와 때죽나무, 단풍나무가 빼곡하다. 걷다 보면 가끔 노루와 다람쥐, 까마귀 등과 눈인사를 나눈다.

그 중 가장 먼저 반긴 이는 까마귀였다. 초입에서 백록담까지 없는 곳이 없다. ‘까악 까∼악’ 귀가 따갑다. ‘과악 과아∼악’ 우는 것도 있다. 까마귀는 제주 사람에게 한이요, 슬픔이다. 제주를 화수분으로 삼은 4·3의 작가 현기영은 ‘순이삼촌’, ‘도령마루의 까마귀’ 등에서 제주의 아픔을 까마귀로 상징했다.

1시간 가량 걸으면 해발 1000m 지점에 위치한 삼나무 군락지와 맞닥뜨린다. 하늘로 곧게 뻗은 시원한 삼나무가 푸른 잎을 드리우며 자태를 뽐낸다. 성판악코스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사라악샘을 지나면 경사가 가팔라지면서 구상나무숲이 펼쳐진다. 구상나무는 지구상에서 오직 한국에만 자생하는 희귀종이다.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면 나무들은 키가 작아져 무릎 밑으로 깔리고, 정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서워진다.

좀 더 오르면 초겨울 한라산 등반의 백미 ‘상고대’를 만날 수 있다. 상고대는 안개나 수증기, 서리가 나뭇가지에 얼어붙어 만들어지는 눈꽃을 말한다.

한라산의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나뭇가지마다 몽실몽실한 서리꽃을 피워올리느라 여념이 없다. 눈길 닿는 곳마다 하얀 얼음가루를 뿌려놓은 듯 눈부시다.

고재홍 건설협회 전남도회 부장은 “모처럼 한라산에 올랐는데 환상적인 상고대가 반겨줘 황홀했다”며 “평생 기억에 남을 산행이었다”고 감탄을 자아냈다.

정상 500여m 아래부터는 나무계단이 이어지다가 칼바람이 불어닥친다. 얼굴이 얼얼할 정도다.

한라산 정상 1950m 팻말이 보이고, 나무 난간 너머엔 백록담이다. 백록담은 둘레 1720m, 깊이 108m의 화구호다. 안개가 걷히고 한라산 백록담의 신비로운 자태가 드러났다. 그러는가하면 다시 시커먼 운해에 잠겼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태양의 신 아폴로의 일진일퇴 공방을 보는 듯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백록담. 이날 등산객들은 백록담과 눈꽃을 한꺼번에 보는 행운의 주인공들이었다.

등반길이 한라산 등산로 중 가장 평탄한 길이었다면 관음사코스를 따라 내려가는 하산길은 험하다. 하지만 한라산 비경이 숨어 있는 곳이다.

삼각봉은 물론 눈꽃을 피운 한라산 북사면의 풍광을 즐길 수 있다. 산봉우리와 골짜기가 교차하는 하산길의 풍광은 백록담을 떠나는 아쉬움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옛 용진각 대피소에서 왼편으로 바라보면 마치 왕관을 쓰고 있는 듯한 바위들이 펼쳐진다. 왕관릉이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된다. 어느 방면으로 사진을 찍어도 한 폭의 동양화다.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 지리산 칠선계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알려져 있는 탐라계곡의 비경도 숨어 있다. 그리고 탐라계곡은 아직 가을이었다.



/제주=글·사진 박정욱기자 jw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