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서운한 계절. 제주 들녘은 육지보다 늦게 찾아온 가을이 뿜는 냄새에 한껏 취했다. 가을 제주를 말하자면 억새를 빼놓기 어렵다. 억새가 찬바람에 춤을 추는 한라산 중턱의 어리목과 산굼부리, 갖가지 오름은 사람 키만큼의 억새가 ‘은빛 파도’를 연출한다. 멀리 한라산을 배경으로 광활한 들판이 온통 억새밭이다. 억새밭을 벗어나면 저물어가는 가을숲의 향기도 맡아야 한다. 콩나물시루만큼 빽빽하게 나무가 심어진 사려니숲길은 소나무와 단풍나무, 때죽나무가 모인 천연림과 삼나무·편백나무로 조성된 인공림이 한데 어울려 가을 낭만이 물씬 풍긴다.

사려니 숲길

해가 뉘엿뉘엿 산을 넘는 오후 5시께면 산굼부리는 역광을 받아 그야말로 ‘황금빛 가을’이다. 해발 400m 들판을 넘실대는 억새의 춤사위에 관광객의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산굼부리는 북제주군 조천읍 교래리에 있는데, 1118번, 1112번 지방도로의 교차점으로, 동서 850m, 남북 730m의 평범한 오름이다. 가운데 지름 600m의 분화구가 있고 이 분화구를 둘러싼 들녘이 온통 억새천지다. 사유지라 입장료 6000원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 흠.

제주시와 중문관광단지를 잇는 도로들은 시내만 벗어나면 하나같이 억새로 물들어있다. 아담한 오름들도 억새 천국. 오름 중에선 제주시 동쪽에 있는 구좌읍 손지 오름과 아끈다랑쉬오름도 억새군락이 꽤 볼만하다. 제주시 서쪽 애월읍 이시돌목장과 모슬포 삼방산 인근도 운전을 하며 쉽게 억새를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남쪽에선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따라비오름이 군계일학이다. 오름 등성이로 촘촘히 심어진 억새가 해 기울기에 따라 다른 빛을 발한다. 제주토박이들은 따라비오름을 최고로 친다.

억새 춤사위를 즐겼다면 피톤치드를 뿜어내는 가을 숲길도 추천한다.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사려니오름에서 물찻오름을 거쳐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비자림로까지 이어지는 15㎞의 사려니 숲길은, 주변에 오름과 나무숲이 어울려 육지에서 만나기 힘든 장대한 생태계가 길 주변으로 펼쳐진다. 사려니는 ‘살안이’ 혹은 ‘솔안이’에서 나온 말. 제주말로 ‘살’이나 ‘솔’은 신성한 곳을 뜻해 신성한 숲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해발 500m의 입구 주변부터 30m에 이를듯한 삼나무가 높게 솟아있는데, 붉은 흙을 양탄자처럼 밟고 숲으로 들어가면 삼나무숲이 소나무와 단풍나무로 이뤄진 숲으로 변했다가 어느새 다시 삼나무숲이 나온다. 자연림은 온대산림이라 졸참나무와 서어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 등 갖가지 나무가 한데 어울린 자연의 보고다. 숲길은 평탄하고 오르막이 거의 없어 가족이나 연인의 나들이 코스로 안성맞춤. 숨을 쉴 때마다 공기의 청정함이 느껴져 걷고나면 건강해지는 기분마저 든다. 낙엽이 뒹구는 가을 숲길은 반듯하지만, 길가에는 로빈 훗이 살았던 셔우드숲을 연상케 하는 깊은 숲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운이 좋다면 코 앞에서 노루나 사슴을 마주칠 수 있는데, 이들은 사람을 보고도 놀라거나 피하지 않는다. 입장료는 무료.

/제주=글·사진 임동률기자 exian@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