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화에 봄 사랑이 알큰하게 펴난다/ 알큰한 그 숨결로 남은 눈을 녹이며/ 더 더는 못 견디어 하늘에 뺨을 부빈다/ 시악씨야 하늘도 네가 그립단다/ 매화보다 더 알큰히 한번 나와 보아라/ 매화 향기에서는 가신 님 그린 내음새/ 매화 향기에서는 오는 님 그린 내음새/ 갔다가 오시는 님 더욱 그린 내음새/ …/ 매화보다 더 알큰히 한 번 나와 보아라 서정주 ‘매화’ 】〉〕그러들던 추위가 다시 날을 세우고 여린 봄볕을 헤집고 들어온다. 가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은 겨울. 이미 온줄 알았는데 완전히 봄은 아니다. 겨울의 끝자락을 잡고 봄의 손을 당긴다. 그 무엇보다 봄이 정말 봄 다워지는 것은 광양 백운산자락 섬진마을에 이르렀을 때다. 이곳에 한바탕 하얀 매화 꽃사태를 벌여 놓은 다음에야 봄은 봄으로서 진정 의미있는 몸짓을 시작한다. 연분홍꽃 저고리와 청보리 녹색치마로 곱게 단장한 백매화 검은 고목에 안개비가 살포시 내린다. 심술궂은 섬진강 실바람이 꽃잎을 흔들 때마다 영롱한 빗방울이 옥구슬 구르듯 청보리밭으로 떨어진다. 흰눈이 내린 듯 솜사탕을 꽂은 듯 강마을을 하얗게 덧칠한 한폭의 수채화가 꽃비 내리는 봄날 백운산 자락에 내걸렸다. 광양시 다압면 신원리 매화마을. 매화가 지천으로 핀다고 해서 마을이름까지 ‘매화마을’로 바뀌었다. 이곳은 영호남이 만나는 화개장터가 있는 경남 하동과 광양을 잇는 백운산을 뒤로 하고 앞으로 지리산을 마주하고 있는 66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 매화의 결정체는 산중턱에 자리잡은 ‘청매실농원’이다. 10만여평의 농원에 만개한 홍매화, 청매화 백매화가 손님을 맞는다. 매화 너머로 보이는 섬진강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농원은 지금 매화축제(12∼20일)가 한창 진행중이어서 평일에도 꽃구경 인파로 넘쳐난다. 축제기간에 문인시화전, 전국매화사진촬영대회, 평양예술단공연(19일 오후 2시), 매화축제축하음악회(19일 오후 4시) 매화웨딩마치(20일 오후 2시)등이 상춘객을 반긴다. 매화꽃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인적 뜸한 강변이나 나 홀로 꽃을 피우는 매화를 찾는 것이 더 운치 있을 수도 있다. 매화는 고래로부터 한파를 뚫고 피어나는 절개와 지조로 인해 문사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다. 퇴계 이황은 이질에 걸려 고생할 때 자신의 피폐함을 매화에게 보이기 싫어 분재를 다른방으로 옮겼을 정도로 매화를 인격체로 대하고 ‘매형(梅兄)’이라 불렀다. 고려시대 정도전도 “//기특하기도 해라, 저토록 수척한 것이/ 얼음 서리 물리쳐 내네” 라며 매화의 청아한 품격을 기리고 있다. 청매실농장의 한편에 3000개의 항아리들이 섬진강을 굽어보며 떡 하니 자리하고 있다. 매우(梅雨)가 내릴 무렵 익기 시작해 결실을 맺은 매실들을 수확한 뒤 매실된장, 장아찌 등을 저장하기 위해 준비한 항아리들이다. 항아리 위편에는 왕대나무 숲이 청청한 가지들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왕대숲과 항아리들을 지나 강변으로 내려오는 길에 외양간 처마 밑으로 활짝 핀 매화를 매단 가지들이 늘어져 있다. 어디선가 서늘한 향이 코끝을 간지러 고개를 돌려보니 이른 매화구경을 나온 여인들 서넛이 천천히 내려가는 중이다. 여인의 향인지 매향인지 구별이 어렵다. 본격적으로 자태를 선보이기 시작한 매화들 곁에 서서야 그것이 여인의 화장 냄새가 아니라 매향인줄 알았다. ‘암향(暗香)은 달빛 어스름한 저녁 멀리서 은은하고 청아하게 풍겨오는 매화 향기를 일컫는 말이다. 매화 향기는 자극적인 편이 아니다. 밤이 깊어 사위가 적막할 때 비로소 먼 곳에서도 스며드는 은은한 향기야 말로 매화의 진수다. 매림(梅林)을 거닐면서 봄기운에 녹아있는 매향에 젖어들면 정신이 몽롱해진다. 더욱이 매화송이 하나 뚝 따서 술잔이나 찻잔에 띄어 놓으면 향과 어울리는 술과 차의 맛이란 봄이 오기 전에 꽃 세상의 아늑한 정취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일 듯 싶다. 춘심(春心)을 못견디게 자극하는 그 향기, 수많은 문사들이 맥 못추고 술에 취해 시심을 내뿜게 한 매화꽃은 이번 주말과 다음주말께 절정에 이르러 4월초까지 그 자태를 뽐낼 것이다. /최재호기자 lion@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