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특별 기고-정찬주 소설가] 홍매화 피는 설을 맞이하며
2018년 02월 14일(수) 00:00 가가
우리 가족은 매년 설 하루나 이틀 전에 성묘를 먼저 한 뒤 차례를 지내곤 했다. 이제는 으레 서울에 사는 자식들도 미리 와서 91세 된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성묘를 한다. 선산은 보성군과 화순군을 경계 짓는 계당산 산자락에 있다. 거기에는 고조부부터 선친까지의 유택이 양달 여기저기에 자리하고 있다.
계당산은 나에게 나의 근본과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산이다. 계당산 허공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바람에 따라 운명이 바뀐다. 화순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만나면 보성강으로 흐르다가 섬진강 물에 섞인다. 반대로 보성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만나면 지석강으로 흐르다가 영산강이 된다. 빗방울이 어떤 바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강이 달라진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 역시 선대와 선친이란 뿌리가 있었으므로 하동 정씨 ‘복내 문중’ 속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우리 가족의 성묫길은 수월한 편이다. 내가 사는 산방에서 계당산 산자락에 있는 재 하나만 넘으면 된다. 선산은 의외로 지척에 있다. 어린 시절에는 솔가지를 꺾어 놓고 절했는데 지금은 나부터 안 하고 있다. 솔가지를 꺾는 것이 효도와 무관하다는 판단에서다. 그리고 나는 상석에 술 대신 차를 올린다. 생전의 선친께서 술보다는 차를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또 하나, 나만의 습관이 있다면 상석에 음각된 할머니들의 성씨를 한 번 더 들여다보는 일이다. 증조할머니는 보성 선씨, 큰할머니는 진원 박씨, 할머니는 김해 김씨다. 집안을 이어 온 할머니 성씨라도 제대로 알고 감사하는 것이 후손으로서 도리 같아서다.
성묘를 하고 나면 마음은 더 없이 정갈해진다. 그런 마음으로 지내는 차례이니만큼 조상님들의 음덕으로 무슨 일이든 술술 잘 풀릴 것만 같다. 예전에는 섣달 그믐날을 까치설이라 부르며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사촌 형제까지 모여 밤새 정담을 나누었는데 요즘은 사라져 가는 풍습이 돼 버렸다.
새해 첫 해가 선(立)다고 해서 설날이 된 바, 차례를 지낸 뒤에는 웃어른께 세배하고 아이들은 세뱃돈을 탄다. 예전에는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친척 어른들께 새해 인사를 한 뒤 윷놀이 등으로 하루를 보냈지만 이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대가족에서 핵가족 시대로,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시대로 탈바꿈하면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듯하다.
세배할 때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과 함께 큰절을 한다. 이는 어른이 먼저 복을 받아야 한다는 우리 민족만의 인사법이다. 복이란 스스로 짓고 받는 법이다. 새해 인사를 하느라고 일가친척이 많이 모이면 집안이 복작복작 소란스러워진다. 여기서의 소란스러움은 서로가 복을 짓는 ‘복작복작’(福作福作)이 아닐까 싶다. 차곡차곡이란 말이 차가 창고에 가득 쌓인 모습에서 유래했다니 그럴 만도 하다.
한편, 설을 생각할 때면 나를 부끄럽게 하는 기억이 하나 있다. 보성군 홈페이지에 홍암 나철 선생의 일대기 ‘단군의 아들’을 연재하면서 알게 된 역사적 사실이다. 구정(舊正)과 신정(新正)이란 말을 별 생각 없이 써 왔는데 그게 대단히 잘못된 역사 인식의 용어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독립운동의 대부이자 단군 사상 실천자였던 보성 벌교 출신의 나철 선생은 일제가 권장하는 이른바 신정을 단호히 거부하고 우리 민족의 전통 풍속이자 얼이 담긴 설을 고수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일제는 우리 민족 문화 말살책의 일환으로 양력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도록 강요했다. 1896년 1월 1일부터 민족 고유의 설을 양력 1월 1일에 신정이란 이름으로 지내도록 했는데, 음력설을 쇠지 못하게 1주일 전부터 방앗간 문을 닫게 하는 등 온갖 횡포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나철 선생의 홍익 사상을 추종했던 역사학자 신채호, 한글학자 주시경, 개천절 노래 작사가 정인보, 독립군 대장 김좌진 등은 신정을 단호히 배격하고 음력설을 쇠면서 국권 회복과 광복 의지를 더욱 다짐했다.
마당가 홍매 가지에 꽃망울들이 대롱대롱 달려 있다. 나는 혼이 달아나 버린 꽃보다도 꽃망울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꽃의 혼이 있다면 무엇일까? 나는 꽃의 빛깔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홍매의 혼은 붉은 빛깔이다.
일찍이 미당 서정주 선생은 “성철 스님을 뵙고 있는데 스님의 모습 뒤로 분홍 빛깔이 선명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성철 스님의 후광 빛깔이었을 텐데 사람마다 다르고, 있거나 없거나 할 것이다. 나는 무슨 빛깔인지 몹시 궁금하다. 설을 전후해서 날이 포근해진다면 내 산방 마당가의 홍매화가 한두 송이 피어날 것도 같다.
계당산은 나에게 나의 근본과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산이다. 계당산 허공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바람에 따라 운명이 바뀐다. 화순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만나면 보성강으로 흐르다가 섬진강 물에 섞인다. 반대로 보성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만나면 지석강으로 흐르다가 영산강이 된다. 빗방울이 어떤 바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강이 달라진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 역시 선대와 선친이란 뿌리가 있었으므로 하동 정씨 ‘복내 문중’ 속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세배할 때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과 함께 큰절을 한다. 이는 어른이 먼저 복을 받아야 한다는 우리 민족만의 인사법이다. 복이란 스스로 짓고 받는 법이다. 새해 인사를 하느라고 일가친척이 많이 모이면 집안이 복작복작 소란스러워진다. 여기서의 소란스러움은 서로가 복을 짓는 ‘복작복작’(福作福作)이 아닐까 싶다. 차곡차곡이란 말이 차가 창고에 가득 쌓인 모습에서 유래했다니 그럴 만도 하다.
한편, 설을 생각할 때면 나를 부끄럽게 하는 기억이 하나 있다. 보성군 홈페이지에 홍암 나철 선생의 일대기 ‘단군의 아들’을 연재하면서 알게 된 역사적 사실이다. 구정(舊正)과 신정(新正)이란 말을 별 생각 없이 써 왔는데 그게 대단히 잘못된 역사 인식의 용어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독립운동의 대부이자 단군 사상 실천자였던 보성 벌교 출신의 나철 선생은 일제가 권장하는 이른바 신정을 단호히 거부하고 우리 민족의 전통 풍속이자 얼이 담긴 설을 고수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일제는 우리 민족 문화 말살책의 일환으로 양력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도록 강요했다. 1896년 1월 1일부터 민족 고유의 설을 양력 1월 1일에 신정이란 이름으로 지내도록 했는데, 음력설을 쇠지 못하게 1주일 전부터 방앗간 문을 닫게 하는 등 온갖 횡포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나철 선생의 홍익 사상을 추종했던 역사학자 신채호, 한글학자 주시경, 개천절 노래 작사가 정인보, 독립군 대장 김좌진 등은 신정을 단호히 배격하고 음력설을 쇠면서 국권 회복과 광복 의지를 더욱 다짐했다.
마당가 홍매 가지에 꽃망울들이 대롱대롱 달려 있다. 나는 혼이 달아나 버린 꽃보다도 꽃망울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꽃의 혼이 있다면 무엇일까? 나는 꽃의 빛깔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홍매의 혼은 붉은 빛깔이다.
일찍이 미당 서정주 선생은 “성철 스님을 뵙고 있는데 스님의 모습 뒤로 분홍 빛깔이 선명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성철 스님의 후광 빛깔이었을 텐데 사람마다 다르고, 있거나 없거나 할 것이다. 나는 무슨 빛깔인지 몹시 궁금하다. 설을 전후해서 날이 포근해진다면 내 산방 마당가의 홍매화가 한두 송이 피어날 것도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