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태동기였던 1980년대 초에 청춘을 보냈던 40∼50대가 21세기 초반에 주도권 세력으로 등장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의 걸쳐 있던 회색주의자들은 이전 세대의 잔재를 벗지 못하고 생활과 사고방식에 있어서 아노미(Anomie)적 증상을 보였다. 디지털 시대의 급습은 이전까지의 생각과 판단에 기준으로 작용했던 아날로그 방식을 숫자로 표현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감성적이고 인간적인 아날로그 시대와 합리적이고 기계적인 디지털 시대를 동시에 경험한 양성(兩性) 세대는 이전의 순수 아날로그와 이후의 순수 디지털 시대만을 경험한 단성(單性) 세대와 뭐가 다를까?

디지털 시대의 표현 방식인 숫자에도 생명과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숫자에 인문학(Liberal Arts)적인 스토리와 감성을 섞지 않으면 생존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얘기다.

디지털 시대의 총아인 숫자(數)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겨울과 봄이 서로 맞닿아 있었고, 1월과 2월이 붙어있었으며, 여기와 저기는 의식의 문제일 뿐 같은 공간에 존재했으며, 나와 너 또한 하나인 우리였다.

‘부존재(不存在)’의 뜻을 가지고 태어난 ‘0’이 사물을 ‘있다’와 ‘없다’로 표현하게 하면서 컴퓨터가 ‘0’의 개념을 끌어들이게 된다. 연속성과 영원성의 아날로그 시대는 불연속성과 단절을 의미하는 디지털 시대에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고 그것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틈을 봉쇄해버린다. 그로 인해 잃게 된 것은 바로 인간성이고 자연스러움의 상실이었다.

LP(Long-Playing Record)가 CD로 전환되면서 음악에 있어서 소중한 자연스러움이 사라져버렸다. 그것이 ‘떨어져 나간 조각’이다. 원래 소리는 아날로그다. 즉, 음파는 끊어진 것이 아니라 이어진 파장이다. 자연의 소리를 최대한 구현한 LP와 달리 전기적으로 녹음하고 편집하고 재생하는 CD는 음을 조각내어 선(線)이 각(角)으로 해체되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 즉, 자연스러움이 사라진다. 편리함과 대량 생산을 자연스러움과 바꾼 것이다. 공간감과 따뜻함과 자연스러움으로 대표되는 아날로그 시대가 차가움과 부자연스러움의 디지털로 빠르게 대체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과정에서 잃어버린 가치를 찾아 나설 때이다. 상극(相剋)은 서로 통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서로 상극이면 디지털이 가져온 많은 병폐와 사회적 질병을 아날로그로 치료할 수 있다. 인간성이 반영된 디지털 상품을 만들기 위해 아날로그적 가치를 찾아 나선 스티브 잡스, 그는 생각은 아날로그로 하되 표현은 디지털을 요구했다.

가격에 천착된 디지털 고객에게 아날로그적으로 스토리와 감성을 접목시키면 오랜 친구처럼 가까워진다. 디지털 사회의 병증(病症)을 앓고 있는 고객에게 인간다운 감성을 바탕으로 한 아날로그적 처방은 분명 효과가 있다.

아날로그는 효과가 한방(韓方)이어서 느리게 나타나지만 오래가고, 디지털적인 처방은 양방(洋方)이어서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지만 오래가지 않고 부작용이 많다. 숫자는 숫자를 먹고 산다.

디지털로 분석된 고객은 지속적인 숫자적 우위를 요구한다. 원색(原色)은 디지털이지만 혼합색은 질리지 않는 아날로그이며, 음악의 독주는 디지털이지만 합주는 아날로그다. 앞뒤가 떨어져 나간 디지털 정보는 진정한 정보가 아니며 선후가 고려된 아날로그 정보가 진실이며,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디지털이라면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아날로그다. ‘검다’나 ‘하얗다’와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가 기계적이면서 디지털이라면 ‘거무튀튀하다’거나 ‘희끄무레하다’가 인간적이며 아날로그적이다.

아날로그는 순간과 영원이 공존하지만 디지털은 순간의 연속인 영원만 남는다. 추억은 아날로그여서 지워지지 않으며, 젊었을 때는 디지털이지만 늙으면 아날로그를 찾게 되며 그래서 아날로그는 고향이다.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떠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