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갈등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그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게 정치의 역할이다. 정치가 조정의 역할을 포기한 순간 사회는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되고 다양한 목소리는 폭력이 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정치는 아무리 미워도, 지겨워도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숙명적 관계에 놓여있다. 그런 정치가 개인과 조직 간의 갈등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권력 갈등에만 골몰하고 있다.

정치인은 언어적 폭력, 정당 간의 이합집산, 계파 간의 혈투, 부정부패 등으로 국민의 삶과는 괴리돼 있다. 되레 국민들로부터 위임된 권력을 마치 자기 권력인 양 주인 행세만 하고 있다. 일명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로까지 회자되고 있는데 이는 전 세계적인 추세이지만 유독 대한민국이 더 심하다.

무엇이 문제인가. 인물의 문제인가 제도의 문제인가. 인물의 문제라면 계속해서 좋은 사람을 대표자로 뽑으면 해결되는가. 시간을 거슬러 2000년대 초반으로 가보자. 당시 DJ 정부의 ‘젊은 피 수혈’이라는 명목 아래 30대 초반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여야 가릴 것 없이 진출하였다.

그리고 17대부터 19대 국회까지 선거를 통해 교체된 인물이 평균 50%를 넘는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인물 교체다. 그럼에도, 우리 정치는 여전히 국민으로부터 외면과 질타를 받고 있다. 아무리 좋은 인물, 훌륭한 사람도 제도권에 포획된 순간 그 역시 일반 정치인들과 다름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제도의 문제인가. 그렇다고 주장하는 쪽은 현재 북유럽을 중심으로 한 선진 유럽국가의 정치 행태를 주목한다. 언론이나 방송을 통해 본 그 나라들의 정치는 사회적 갈등, 개인 간의 갈등을 협의와 조정, 그리고 종국에는 합의를 이끌어가는 합의제 민주주의가 오래전부터 정착되어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권력에 대한 특권이 없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정치의 기본인 국민들에 대한 봉사를 전제로 정치가 이루어진다. 일이 너무 많아 힘들어서 그만 두는 정치인도 많다. 우리나라도 지난 2000년대 중반부터 여야 가릴 것 없이 많은 정치인이 독일로 날아가 독일 정치를 공부하고 독일 정치 시스템을 우리나라에 도입해야 한다고 되뇐다.

대체 그들 나라의 정치 행태는 어떤지 잠시 보자. 정치는 기본적으로 선거 제도와 정당 체계이다. 이 두 가지가 제대로 작동하느냐 여부에 따라 정치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갈린다.

먼저, 우리나라의 선거 제도는 현재 단순 다수제이다. 단 한 표라도 많이 얻는 사람이 모든 것을 독식하는 승자독식의 선거제도이다. 51%와 49%의 득표로 51%가 모든 권력을 독차지한다. 낙선한 49%의 민의는 사장된다.

그러니 집권 기간 내내 서로 반목, 질시하며 싸울 수밖에 없다. 한쪽이 죽어야 다른 한쪽이 살아나는, 즉 상대의 헛발질이 다른 쪽에서는 정치적으로 이익을 얻는 구조다. 이런 구조 속에서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 또한,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우리 민주주의는 다수제이다 보니 소수 의견이나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는 무시되고 네 편, 내 편으로만 나뉜다. 사고도 다양성이나 창의성이 말살된 이분법적 논리에 사로잡힌다.

반면, 합의제 민주주의는 다변화된 사회의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묻고 조정 협의하며 합의로 이끌어가는 구조다. 정당 체계 역시 선거제도가 바뀌어야 현재의 거대 양당 구조 중심의 정당 체계가 바뀐다. 그동안 우리 정당은 거대 양당이 독식하며 선거 때만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공약하지만 막상 선거 이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동안 두 정당이 번갈아 집권하고 의회 권력의 다수를 차지하며 적대적 공존 관계를 유지해왔다. 정치는 인물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제도의 개선이 우선 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인물을 교체해도 낡은 정치 환경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 정치는 너무 낡아 침몰 직전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고장난 채 운행되고 있다. 선거 제도 개편을 통한 합의제 민주주의로 가는 게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