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을 폭염과 가마솥더위라고 표현하기엔 뭔가 미진한 것 같다. 급기야 불타는 태양의 열기를 돔 아래 가둬놓은 듯한 ‘열돔’이라는 최상급의 단어까지 등장했으니 말이다.

허름해진 기억력 탓일까. 어린 시절 여름날은 아무리 더워도 선풍기 바람 아래 시원한 수박을 한 입 베어 먹으면 여름나기가 족했다. 조금 더 호사를 부려 얼음 동동 띄운 수박화채 한 그릇을 비우면 더위가 저만큼 물러섰던 기억이 아련하다.

기상관측 사상 올해가 가장 덥다고 하니, 시원한 추억과 함께 하는 것 같아 우리 옛 그림 속 ‘수박 그림’이 더욱 반갑다. 지난해 들렀던 해남 녹우당에서 만난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수박그림을 대하고 공재가 정물화를 남겼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돼 몹시 가슴 뛰었던 생각이 난다.

공재의 ‘채과도(菜果圖)’는 석류와 유자, 매화가지 등을 참외모양의 주름진 그릇에 담은 ‘석류매지도(石榴梅枝圖)’와 쌍폭을 이루는 그림이다. 우리 옛 그림에 정물화 성격을 지닌 잡화 계통의 그림인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채과도’는 본격적으로 서양정물화의 구도 및 배치를 따르면서 작가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정물화로 여겨지고 있는 그림. 수박, 가지 두 개, 참외 등 여름 과일과 채소가 백자그릇에 담겨져 있고 특히 먹이 번지는 화면을 담백하게 보여주는 수박 그림에서는 뚜렷하게 묘사된 서양식 음영법도 눈길을 끈다.

공재 하면 한국남종화를 열었다는 미술사적 무게와 함께 인상적인 자화상과 풍속인물화가 먼저 떠오르지만 정물화를 그린 화법과 소재에서도 진취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주변에 흔해 지나쳤던 수박, 참외, 가지 등 과일과 채소가 공재의 화폭에 담기면서 예술 작품의 모델로 재발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