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1조 제1항이다. 촛불정국때 가장 많이 인용된 문장으로, 국민이 국가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뜻이다. 제2항에서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최초로 선포한 것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이보다 330여년 앞서 조선에서 공화제를 주장한 이가 있었다. 왕정시대에 왕정 폐지를 주창한 이는 전라도 출신 선각자 정여립이었다. 공화제가 대중에게 각인된 사건은 동학혁명이었다. 이후 100여년간 우리 현대사는 민주공화국이 프레임이 됐고, 시대정신으로 자리매김 했다.

◇“천하는 공물” 공화주의자 정여립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어찌 임금 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 있는가? 누구든 섬기면 임금 아니겠는가”

정여립이 설파한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이다. 누구나 군주를 대신해 백성을 대표할 수 있다는 공화제 사상이다.

앞서 이를 유학사회에 제시한 인물은 공자였다.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서 공자는 “대도(大道)가 행해졌던 때는 천하가 공공의 것이었다”고 했다. 이 때는 천하가 임금이나 소수 귀족의 소유가 아니라 모든 백성의 소유였다는 뜻이다.

사실, 정여립은 공자의 가르침에 충실했다. 하지만, 왕정 시대의 주장이었으니, 과히 혁명적이다. 집권세력 입장에서는 역모가 아닐 수 없다.

정여립은 전북 전주 태생으로 명문가 자제였다. 당대 최고 석학인 이이와 성혼이 인정할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였다. 관운도 좋아 탄탄대로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급제동이 걸렸다.

서인이었던 정여립이 당파를 동인으로 바꾼 것이 화근이었다. 명분에 살고 죽던 조선에서 당파를 바꾼 것은 곧 ‘철새정치인’이요, 그 것도 모자라 스승까지 비판했으니 ‘배은망덕’이었다. 이 때문에 서인은 물론 왕(선조)까지 비난하고 나섰다. 정여립은 더 이상 버틸 재간은 없었고, 결국 관직에서 물러났다.

진안 죽도로 낙향한 그는 ‘대동계’를 조직했다. 양반과 천민을 따지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게 참여한 단체다.

죽도서실을 열어 대동세상을 설파했다. 계원들은 매달 한 번씩 모여 말타기·활쏘기·검법 등을 연마했다. 대동계의 군사력은 임진왜란 5년 전(1587년) 여수 손죽도에 출몰한 왜적들을 무찌른 데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피바람이 몰아쳤다. ‘대동계가 한양 침공을 준비한다’는 고발장이 접수됐다. 사태는 살벌했다. 동인의 영수 이발 일가족이 몰살당한 것을 비롯해 1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동계와 무관한 사람도 무수히 처형됐다. 조선판 마녀사냥으로, 무려 3년간 지속됐다. 학살극을 주도한 인물은 수사본부장을 맡은 송강 정철이었다. 이후 전라도는 반역향이라 하여 호남인의 등용길이 막히게 됐다.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는 “정여립은 400년 전 군신강상론을 타파하려 한 동앵의 위인으로써 민양론을 저작한 루소와 견줄만하다”고 했다. 동양 최초 공화주의자라는 평이다.

정여립의 개혁사상은 실학자들에게 이어졌고, 동학혁명을 거치며 하나하나 실현됐다.

진안 죽도와 천반산은 정여립의 한(恨)이 서린 곳이다. 그를 찾아 나선 4월 초, 하늘은 음울했다. 황사까지 더해 시야마저 가렸다. 산천도 ‘무언가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은데, 해보았자 무엇하겠느냐’며 잔뜩 찌푸렸다.

죽도는 산죽이 많이 자란다. 그래서 죽도다. 지질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백악기 중기(9000만년 전) 화산 폭발과 하천 침식으로 곡류하천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주변엔 수직 절벽이 발달해 감입곡류를 형성, 절경을 만들어냈다.

천반산과 죽도를 마주한 산길에서 동양 최초 공화정치를 꿈꾸었던 선각자 정여립을 다시 떠올린다.

◇‘조선의 잔 다르크’ 여성 동학군 이소사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나이는 꽃다운 22살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이고, 이름은 이소사라고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는 말 위에서 지휘를 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꿈에 천신이 나타나 오래된 제기를 주었다고 하며, 동학도 모두가 존경하는 신녀가 되었다.” <일본 국민일보 1895년 3월5일자>

여자 동학농민군 ‘거괴’(거물 괴수) 이소사에 대한 일본 신문 기사의 일부다.

이소사는 봉건 차별이 극심했던 조선 말, 동학농민전쟁 장흥전투 선봉에 섰던 여성 혁명가다. 남녀·적서·존비의 차별과 외세에 맞서 저항한 선봉장이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를 구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잔 다라크의 조선판으로 불린다.

그의 기록은 거의 없다. 체포 당시 장흥부사 박헌양을 참시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토벌군의 심문기록에는 남겨져 있지 않다.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만,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이두황의 심문 보고에는 그가 미치광이이자 요물로 등장한다.

“장흥 민인(民人)들이 체포한 여동학이 껄껄 웃으며 신이부인(神異夫人)이라 칭하며, 요상한 말을 외우며 쏟아냈다. 혹 어리석은 사람의 하나이거나 대요물인바…”

이소사가 쏟아냈다는 ‘요상한 말’은 다름 아닌 동학의 21자 주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신 존귀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은 주문이다. 불교의 ‘나무아미타불’과 같은 의미다.

요상한 말은 그의 신념이자 의기였다. 이두황은 고문을 통해 이소사의 의기를 꺾으려했을 것이고, 뜻대로 되지 않자 미치광이로 매도했을 것이다. 그는 목숨으로 신념과 의기를 지켰다.

신(한울님)과 인간은 동일한 존재라는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인간평등의 원리로 발전했다. 양반-상놈-노비의 엄격한 신분구조로 억눌려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됐다. 실제 동학에 입도했던 백범 김구는 저서 ‘백범일지’에서 “상놈 된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가 더 할 수없이 고마웠다”며 동학의 평등주의에서 자신의 이상향을 발견했음을 밝혔다.

정여립의 대동사상이 민중의 힘과 자각에 의해 실현된 곳이 ‘동학’이다. 세계 최초 공화주의를 제창한 정여립의 대동사상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한울님’이라고 설파한 동학은 전라도 땅에서 꽃을 피워 근대사의 출발점이 됐다. 그리고 그 정신은 현대에 들어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전북 진안=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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