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생각하면 그리웁고/바라보면 정다운 집/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살아있는 집…”<김용택 작 ‘그 여자네 집’ 중에서>

가을이면, 가로수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쏟아져 내리는 늦가을이면, 나도 모르게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 마음이 센티멘탈해진다. 그깟 은행잎이 뭐라고, 여기 저기 마른 잎들이 나뒹구는 노란 잎이 뭐라고 만추의 서정은 가을앓이 마냥 바스락거리며 밀려드는지. 한동안 마음의 여유 없이 지낸 탓에 무뎌질 대로 무뎌지고 건조해진 감수성이 은행나무 아래에 서서 비로소 되살아나는 것인가.

올 가을 유난히 은행나무 은행잎이 곱다. 출근길 가로수길은 아예 노란 길. 은행나무 한 그루가 시가 되고, 이야기가 되고, 이미지가 만들어져 좋은 그림으로 숙성되는 걸 보면 새삼 예술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연을 발견하는 재능이 놀랍기만 하다.

한희원 작가(1955~ )의 ‘강과 만추’(1999년 작)는 가을이면 떠오르는 그림이다. 오래전 화가가 교사이던 시절 여행하듯 통근하면서 마주한 섬진강변 은행나무와 강을 그린 작품으로, 처음 접했을 때의 강한 인상이 두고두고 남을 정도여서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강가에 서있는 은행나무, 바람이 불고 있는지 바람결 따라 우수수 쏟아지는 노란 은행잎이 거리에 깔리고 시간과 공간까지도 노랗게 물들여진 작품은 무엇이 풍경이고 무엇이 대상인지 그림을 바라보는 시선이 몽롱하고 뭉클해진다.

침묵 속에 흐르는 강과 우리가 가고 싶은 먼 나라의 동경을 바람과 함께 묘사하고 있는 화가는 “붓의 느낌에도 바람이 있어 붓을 바람처럼 사용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광주비엔날레 정책기획실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