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수 년 전 중국여행길에 나섰던 백두산행은 초입에서부터 악천후에 막혀 발길을 돌려야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백두산 천지는 아무에게나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최근 더욱 실감해본다. 백두산 천지에서 손을 맞잡은 남북 두 정상의 모습은 가지 못한 백두산 천지에 대한 미련과 우리들 또한 중국이 아니라 우리 땅을 밟고 그곳에 가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한다.

서예가 학정 이돈흥(1946~ )의 그림 ‘천지’(2012년 작)는 그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던 파란 하늘 아래 하늘보다 더 맑고 푸른 백두산 천지의 절경을 떠오르게 한다. 1990년 처음 백두산을 방문한 이래 지금까지 다섯 차례 천지를 만났던 학정은 그 때의 강렬한 감흥과 감동을 일필휘지의 필력으로 표현했다.

“처음 백두산 천지를 찾았을 때 하늘에 하얀 달이 떠있었고 그 달이 맑은 천지에 비추어서 가히 태초에 하늘이 열리는 듯 한 느낌이었다”면서 “중국 쪽에서 오른 백두산이라 위치는 달랐지만 사무치게 장엄하고 아름다웠던 당시의 느낌을 뉴스에서 다시 만나 반가웠다”고 전한다.

일찍이 송곡 안규동(1907~1987)에게 글씨를 사사했던 학정은 스승의 권유로 남종화의 대가 아산 조방원(1926~2014)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바른 마음이 손재주의 주인”임을 늘 새기며 연묵의 여가에 종종 그림을 그려왔는데, 얼마 전부터는 서예를 통해 깊어진 정신세계를 유화 형식으로 표현한 새로운 미술 장르를 이른바 ‘몽화(夢畵)’라 이름 붙이며 선보이고 있다. 자연의 맑고 깨끗한 흐름을 마음의 기운으로 자유롭게 표현한 몽화는 그림인 듯 글씨인 듯 추상적이면서도 생동감이 화면에 가득하다.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학정체’를 일궈낸 학정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큰 서예가로 ‘신동국진체’를 꿈꾸면서 현재 수많은 제자와 명필을 길러내오고 있다. <광주비엔날레 정책기획실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