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국립5·18묘지에서 열린 ‘대인 홍남순 변호사 제10주기 추모식’ 장면.

지난 2017년 12월 8일 광주 동구 궁동에 자리한 홍 변호사 가옥 앞. 홍남순기념사업회(회장 박석무)는 홍 변호사 자택이 사적지로 지정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표지석 제막식을 거행했다. 홍남순 변호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 제막식에는 박석무 이사장, 송기인 신부를 비롯해 30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의 뜻을 기렸다.

홍 변호사 가옥은 5·18 당시 재야 민주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곳이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토론과 회의가 이곳에서 개최됐으며 구속자 석방 논의뿐 아니라 관련 문건 작성 등이 이루어졌다.

이에 앞서 광주시는 그해 9월에 홍 변호사의 가옥을 사적지로 지정했다. 시는 5·18사적지 지정 기준인 ‘시민 다수의 집합적 행동이 이뤄진 곳, 장소성을 갖는 사람들이 다수이며 이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집단적 노력이 전개된 곳’에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사실 홍 변호사의 가옥이 지니는 상징은 만만치 않다. ‘광주의 어른’, ‘시대의 의인’, ‘영원한 재야’, ‘대인’ 등 그를 가리키는 호칭은 광주정신으로 수렴되는 그의 삶과 일치한다. 그의 가택에서 격동의 현대사를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홍 변호사의 가옥은 사실상 ‘방치’상태에 놓여 있다. 집은 경매로 넘어가 타인이 소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커다란 천막이 지붕을 덮고 있어 보기에도 낯설고 씁쓸하다. 집 앞에 은행나무만이 한여름 뙤약볕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특정 공간이 특정 기억과 역사를 환기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홍 변호사의 가옥에 담긴 정신과 장소성은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여전히 오늘의 역사 속에 투영돼 있다. 그럼에도 ‘광주정신의 모태’나 마찬가지인 공간이 ‘방치’돼 있다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5·18은) 그야말로 평화적이고 질서정연한 시위였고 이는 80만 광주시민들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광주사태로 구속된 사람들에 대한 내란죄는 당연히 무죄다. 어린 학생들과 청년들이 다섯 명이나 사형선고를 받고 일곱 명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는데, 어떻게 해서 사형이고 무기형이 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홍남순 변호사가 지난 1980년 12월17일 육군고등군법회의 항소심에서 밝혔던 내용이다. 당시 그는 ‘광주사태 폭도 수괴’로 지목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상황이었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자신의 안위에 앞서 그는 청년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물론 당당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어떤 이는 ‘광주에 홍 변호사가 있다는 것은 광주에 무등산이 있다는 것과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만큼 홍 변호사의 존재는 광주와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를 있게 한 탯자리 인 화순 또한 이에 못지않다. 그의 유년과 청년기를 지배했던 선비사상은 조부의 가르침과 집안의 가풍에서 연유한 때문이다.

“조선 500년을 통치하고 유지하며 견인차 역할을 하고 그 밑바닥이 되어 소금의 역할을 한 것이 이른바 ‘선비정신’이다. 선비는 낮이면 밭에서 일하고 밤이 되거나 비가 오면 글을 읽고 쓰며 도학(도학)을 연구하고, 아무리 배가 고프고 주려도 도덕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또한 선비는 자기 자식뿐만이 아니라 후학, 후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봄으로써 사회를 교화시키고 이끌어 나갔다.” (‘영원한 재야, 대인 홍남순’ 중)

위 글은 1991년 서울의 도산아카데미 조찬세미나에서 홍 변호사가 했던 강연 일부다. 한학으로 일가를 이룬 조부와 능주 향교에서 교총을 지냈던 증조부의 학문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전이됐을 것이다.

홍 변호사가 민주화 이후에도 올곧은 선비정신을 견지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합리적인 의사 결정 과정을 중시했다. 홍 변호사가 집안의 아저씨뻘 된다는 홍기연 전 도곡농협조합장은 “그 분은 평생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집안의 자랑스러운 어른”이라며 “우리 마을뿐 아니라 화순이 내세울 만한 존경스러운 인물”이라고 말했다.

이제 홍 변호사의 유지를 받들고 계승하는 일은 오늘의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다. 지난해 11월 창립총회를 갖고 12월 출범한 기념사업회는 향후 다양한 사업을 전개할 계획이다. 무엇보다 방치 상태인 가택을 매입하는 방안 등을 고민하고 있다. 홍남순 기념관, 홍남순 거리 등을 조성해 그의 정신을 담아내야 한다는 데에 공감대를 이룬 상태다.

기념사업회 김승원사무국장은 “시에 기념관 건립 등을 포함한 기본 계획을 요구한 상태”라며 “행안부 등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어 향후 가택 매입 등 홍남순 변호사 삶과 정신을 선양하는 사업이 추진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화순의 생가 복원도 추진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촛불 혁명으로 이어진 민주화장정은 일생을 통해 홍 변호사가 추구했던 의로운 삶과 연결된다. 생가 복원과 동시에 활용 방안 등을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특히 광주와 연계해 ‘데모크라쉬 루트’(민주주의 여정)을 만드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이밖에 생가와 인접해 있는 고인돌 선사체험과 연계할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 화순이 낳은 조광조, 정율성 등과도 연계한 스토리텔링을 구체화한다면 홍남순은 화순의 브랜드를 넘어 광주와 남도의 브랜드로 확장될 가능성이 높다.

생전의 홍 변호사는 당나라 시인 장유한의 시를 좋아했다고 한다. 평생 민주화의 길에 헌신했기에 가진 것은 별로 없었지만 내면은 늘 부요했다. 여유와 인간미가 넘쳐나는 대인의 풍모를 엿볼 수 있다.

“백옥당 앞 한 그루 매화나무/ 오늘 아침 문득 몇 송이 꽃이 피었네/ 내가 대문을 굳게 닫아놨는데/ 봄빛이 어디로 파고 들어오는지”

한편으로 그는 주변인들과 직업으로서의 변호사가 아닌 동지로서의 인간적인 정을 나누었다. 역사의 가시밭길을 걸어왔던 그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법정에서의 변론에 못지 않게 외떨어진 감옥에서 신음하고 있는 양심수를 찾아 위로하는 ‘법정 밖의 애정’이 더욱 절실했고, 구차한 법조문으로 따지기보다는 정의와 양심으로 그들과 함께 하는 것만큼 당당한 변론이 없었다. 홍 변호사는 말로 변론한 것이 아니라 관심과 사랑으로 변론하였으며, 피고인과 변호인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의 동지로 만났던 것이다.”(‘영원한 재야, 대인 홍남순’의 맺음말 중)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