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지방변호사회는 지난 7월 17일 광주지방변호사회관 1층 로비에서 ‘인권·정의 故 홍남순 변호사 흉상 제막식’을 개최했다.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에 자리한 홍남순 변호사 생가 터. 가옥이 있던 자리에는 옥수수가 심어져 있다.

“군부의 무자비한 총과 서슬퍼런 칼 앞에서도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변호사의 사명을 굳게 지킨 고(故) 홍남순 변호사님. 변호사님의 기개와 헌신을 흠모하는 후배 변호사들이 추모하는 마음을 모아 변호사님의 흉상을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후배 변호사들이 흉상으로나마 변호사님과 마주하며 귀감으로 삼을 변호사상을 정립하고, 함께 나가야 할 법률가의 길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지난 7월 17일 광주지방변호사회는 변호사회관 1층에서 고(故) 홍남순 변호사 흉상 제막식을 가졌다. ‘시대의 의인, 광주의 대표 인권변호사’인 홍 변호사의 제막식에는 유족인 홍기훈 의원을 비롯 홍명재 화순전통문화진흥회 회장, 구충곤 화순 군수 등이 참석했다.

흉상에는 ‘광주사태 폭도 수괴’로 지목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홍 변호사가 육군고등군법회의항소심(1980.12.17.)에서 밝힌 최후진술, 취지문, 약력, 후원 명단 등이 새겨져 있다.

홍남순 변호사(1912~2006)의 고향은 화순군 도곡면 모산리다. 지금은 효산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이다. 흥미로운 점은 마을과 인접해 고인돌마을 체험장이 있는 것이다. 타지에서 고인돌마을을 방문한 이들은 이 마을을 거치게 돼 있다. 이러한 공간적 특징은 향후 화순 고인돌공원과 연계해 고인과 관련한 기념공간의 조성 가능성을 갖게 한다.

남순은 부친 홍남식과 모친 박도남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형적인 시골의 풍경을 간직한 마을의 복판에는 우람한 고목이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다. 수령이 400년쯤 돼 보이는 팽나무는 기다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들이치는 여름의 뙤약볕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안으로는 시원한 그늘을 만드는 팽나무의 은전은 다함이 없다.

그 고목 같은 아니 거목 같은 이가 바로 의인 홍남순이다. 굴곡 많았던 현대사에 드리웠던 ‘의로운 그늘막’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귀한 가르침으로 남았다. 마을 입구에서 그의 흔적을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생가 자리에는 옥수수가 심어져 있을 뿐이다. 마을이나 생가 터나 홍남순 변호사의 연고지라고 알려주는 징표는 거의 없다.

다행인 것은 마을에 홍 변호사의 일가 친척뻘 되는 어르신들이 생존해 있다. 이들은 변호사 홍남순에 대한 기억, 다시 말해 산골소년에서 대한민국 인권변호사로 우뚝 섰던 입지전적인 삶을 자랑스러워한다.

홍 변호사가 집안의 아저씨뻘 된다는 홍명재(79) 화순전통문화진흥회장은 “그 분은 어렸을 때부터 많은 고생을 했지만 불굴의 의지와 뚜렷한 신념으로 자수성가를 했다”며 “오래 전부터 마을에서는 공부를 하려면 홍남순처럼 하라는 말이 있었다”고 밝혔다.

어린 시절 남순은 조부인 홍승규에게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학문적인 공부와는 별개로 소년 남순은 조선의 선비사상을 배웠다. 엄하고 인자했던 조부는 한문이라는 자구적인 가르침보다 그 속에 투영된 사상과 철학을 중시했던 모양이다.

남순이 일생을 통해 법과 원칙을 견지하며 살았던 것은 그 같은 배움에서 연유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조부가 돌아가시자 남순은 적잖은 슬픔과 실의에 빠진다. 무엇보다 배움의 길을 두고 적잖은 갈등에 휩싸인다. 빈한한 살림살이는 배움의 길을 가는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열망은 소년 남순의 가슴에 불일 듯 타올랐다. 어렵사리 월곡학숙과 능주공립보통학교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새벽길을 걸어 만학도의 본분을 다했던 그는 어렵사리 보통학교 과정을 마치게 된다. 졸업할 무렵의 나이가 18세였다 하니, 남순의 배움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한다.

장차 인생의 행로를 모색해야 할 중차대한 시기가 도래했다. 청년 남순은 이곳에서는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일본으로 밀항선을 타고 유학을 떠나게 된 이유다.

우여곡절 끝에 홍남순은 와카야마 시립 상공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3년간 와카야마 상공학교 특설 법제과에서 법률 공부를 하게 된다. 홍명재 화순전통문화진흥회 회장은 “귀국 후 그분은 해남등기소 소장을 역임하고 해남 윤씨 가문의 처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된다”며 “이후 화순등기소장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얼마 후 해방을 맞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홍남순은 1948년 10월 제2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기에 이른다. 이후의 삶은 알려진 대로다. 38세의 나이로 6·25전쟁에 참전하고 1953년 광주지법 판사로 임관된다. 광주고법, 대전지법을 거쳐 1963년 변호사로 나선다.

1965년 한일협정 반대 발언으로 문제가 된 유옥우 의원 사건을 비롯해 양심수를 위한 60건 이상을 무료 변론한다. 이때 ‘법보다 양심’을 중시하는 변호사로 시민들에게 각인이 된다. 1973년 전남대 ‘함성’지 사건, 1976년 3·1구국선언, 1978년 전남대 송기숙 교수의 교육지표사건 등 30여 건의 긴급조치법 위반사건도 맡는다.

“재판이 시작되어 심문이 오갈 때면 가족들과 친지들은 비로소 가슴이 내려앉는다. 삭막한 언어들일망정 말이 오가는 데서 비로소 인간적인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다. 그때 변호인석에 앉아 있는 변호사들의 모습을 글자 그대로 수호천사다. 변론도 변론이지만 피고 편에 버티고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그들의 존재에서 인간에 대한 본원적인 신뢰가 새삼스럽게 뭉클한 감동으로 살아오기도 한다. 홍 변호사님은 그 엄혹한 시절에 이런 재판이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변론을 하였다.”(‘영원한 재야, 대인 홍남순’(나남출판)의 송기숙 축사 중에서 )

홍 변호사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는 내란수괴 혐의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다.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에는 ‘광주5·18구속자협의회’ 회장으로 추대돼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과 5·18명예회복에 주력한다.

고인은 평소 “못살더라도 항상 깨끗하게 살아야 죽음에 이를 때에도 아무런 부끄럼이 없이 역사 앞에 발을 뻗을 수가 있습니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의 인생관이 투영된 말이다. 또한 이 말은 “용기가 있어야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신념과도 연계된다.

이렇듯 홍남순은 의(義)를 삶의 모토로 삼아 현대사의 굴곡을 헤쳐 왔다. 그가 이러한 삶을 살아온 것은 고향과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의로움과 삶의 명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같은 삶은 1985년 가톨릭 인권상, 1986년 대한변호사회 인권상,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홍 변호사는 2011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진 지 5년 만인 지난 2006년 10월 14일 별세한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