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지 안에 조성한 일지암. 이곳의 일지암은 해남 대흥사 일지암을 재현해 조성했다.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다구.

‘청산은 바쁘게 사는 흰 구름을 보고 비웃는다(靑山應笑白雲忙).’

초의선사의 법어 같은 말이 떠오른다. 무안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으며 청산과 구름을 바라본다. 구름이 마치 필자의 모습인양 보인다. “그래 너무 바쁘게 살았다. 쉬엄쉬엄 해찰 부리듯 살아도 될 것을.”

허허롭게 웃다 보니 어느새 초의선사 유적지에 당도해 있다. 찻물 같은 맑은 하늘이 곱기도 하다. 비가 내린 후라 푸른 빛이 성성하다. 한 며칠 장마와 무더위가 경계를 넘나들었지만 오늘만큼은 날씨가 좋다. 바람은 없지만 습도가 없어 청량하다.

잘 덖은 차 한 잔을 마신 기분이다. 맑은 향기가 코끝을 타고 흘러든다. 정신이 맑아지고 몸도 가볍다. 다성(茶聖) 초의선사를 알현하러 가는 길, 몸과 마음을 다잡는다. 오늘은 유적지 곳곳을 둘러볼 참이다. 초의선사 탄생지(유적지)에는 다양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옥화 한잔 기울이니 겨드랑이에 바람 일어/ 몸 가벼워 걸음걸음 옮기는 최상의 맑은 경치여/ 밝은 달은 촛불되어 또 나의 벗이 되고/ 흰 구름은 자리 펴니 한 폭의 병풍이 아닐런지”

초의선사의 ‘맑은 차 한자’이라는 시문을 읊조리며 걷는다. 먼 곳을 굽어보는 듯한 그의 동상 앞에서 생애를 훑어본다. 시(詩)·서(書)·화(畵)·차(茶)에 능했던 그를 일컬어 사람들은 ‘팔방미인’이라고 불렀다. 사람이 일생에 한가지도 능통하기 어려운데 초의선사는 시서화를 넘어 차까지 아울렀다.

기념관에는 그의 삶의 궤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비치돼 있다. 저서와 글씨 등이 눈길을 끈다. ‘일지암시고’, ‘일지암문집’, ‘초의선과’, ‘동다송’, ‘다신전’, ‘초의시고’ 등은 역사적으로나 문헌적으로나 가치가 높다.

‘동다송’(東茶頌)은 한국의 다경(茶經)으로 불린다. 모두 31송으로 돼 있는 작품에는 차의 역사, 차나무의 품종, 차의 생산지와 품질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 차에 관한 것도 6송이 수록돼 있는데, 중국 차에 뒤지지 않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췄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책이 ‘다신전’(茶神傳)이다. 초의선사가 45세 되던 해(1830) 일지암에서 펴냈다. 찻잎을 따고, 덖고, 우리고, 마시는 법 등 올바른 제다법(製茶法)이 기술돼 있다. 이 책 하나로도 다풍(茶風)을 정립했던 초의선사의 일면을 알 수 있다.

기념관을 지나면 다성사라는 절을 만난다. 말 그대로 차에 대한 사찰이다. 사찰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규모다. 초의선사를 기리면서도 우리 차에 대한 우수성을 생각하는 곳이다.

조선차 역사박물관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감돈다. 고궁의 분위기도 없지 않다. 나무 계단을 이용해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조선 차에 대한 모든 것을 만난다. 조선시대의 궁중의 차생활과 유가의 차생활에 대한 정보 등 유익한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돼 있다.

특히 ‘다산 정약용의 걸명소’ 라는 글도 소개돼 있다. 걸명소는 을축년(1805) 겨울에 아암 혜장선사의 배려로 동촌 주막집에서 고성사의 보은산방으로 옮긴 뒤 차를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다.

“마음이 고요하고 욕심이 없을 때, 아침 햇살이 처음 빛날 때, 흰 구름이 맑게 갠 하늘에 둥실둥실 떠 있을 때, 낮잠에서 처음 깨었을 때, 밝은 달이 푸른 시냇물에 맑게 비출 때, 작은구슬 같은 눈발이 날릴 때에 산사에서 등불켜고 자순차의 향기를 맡았고, 활활 타는 불로 새 샘의 물을 끓여 상서로운 맛을 보았습니다.”

차 역사박물관을 나와 당도한 곳은 일지암. 원래 일지암은 해남 대둔사 뒤쪽에 자리하지만 이곳은 대흥사의 것을 재현했다. 의순(초의선사)이 대흥사에서 완호 스님을 뵙고 구족계를 받은 뒤 대흥사에서 수도 정진을 한 사실과 무관치 않다.

일지암에 드나들며 초의 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소치는 초의선사의 모습을 이렇게 술회했다.

“그가 머무는 곳은 두륜산 꼭대기 아래이다. 소나무 숲이 깊고 대나무 무성한 곳에 몇 칸의 초실을 얽었다. 늘어진 버들이 처마에 닿아 있고 풀꽃이 섬돌에 가득 차서 그늘이 뒤엉켜 있었다. 뜨락 가운데는 아래위로 못을 파고 처마 아래에는 크고 작은 물통을 놓아 두었는데 대쪽을 연결해서 멀리서 구름 비친 샘물을 끌어온다.”

초의선사는 종교와 학문을 넘어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과 폭넓은 교분을 나눈다. 정약용, 김정희 등과 승속과 유불의 경계를 넘어 사귐을 이어갔다. 이들의 만남에 은은한 차의 향기와 고적한 학문이 깃든 이유다. 특히 초의선사는 귀양살이하는 김정희를 만나기 위해 제주도를 다녀오기도 했다.

올해는 초의선사 탄생 232주년이 되는 해다. 무안군에서는 지난 5월 탄생지에서 초의선사 탄생문화제를 개최했다. 98년부터 현창사업(顯彰·밝게 나타냄)을 추진한 탄생지 일원에서 매년 음력 4월 5일 전후 탄생일을 기념해 문화제를 연다. 전국적인 다도의 성지로 재정립하자는 취지다.

16회째를 맞이한 올해 행사의 주제는 ‘선다일여(禪茶一如)로의 여행’. 이번 문화제에서는 지역주민과 관광객, 전국의 다인들이 참석해 헌다제, 봉헌의례, 헌다례 등이 개최됐다. 또한 다성사 음복회, 무료차 시음 외에 향토식당 먹거리장터가 운영돼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었다.

조선시대 차문화 다도구 전, 초의선사 서화탁본, 초의 붓글씨 쓰기 등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해 참여도를 높였다. 이밖에 청소년 글짓기 및 사생대회가 열려 청소년들에게 초의선사의 정신과 지혜를 함양하게 했다.

초의선사 탄생문화제는 전국적인 차 문화행사로 정평이 높다. 전국에 있는 다인(茶人)들 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순례지, 메카로 손색이 없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임동현 기자 idh@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