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군 삼양읍 왕산리에 소재하는 초의선사 탄생 유적지에는 생가, 기념관, 보제루 등 초의선사의 삶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16동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무안군 제공>

유적지에 있는 차밭. 봄에 찻잎을 따고 전지를 한 후라 빛깔이 불그스름하다.

유적지에 있는 차밭. 봄에 찻잎을 따고 전지를 한 후라 빛깔이 불그스름하다.

올 한해도 벌써 절반이 지나갔다. 시간이란 비누가 닳아지듯이 시나브로 사라져가는 것인가 보다. 무심히 지나다보면 흔적 없이 닳아져버린 뒤에야 존재를 알게 되니 말이다. 우리 삶도 매한가지여서 관심을 갖고 보지 않으면 누군가의 존재를 인식하기 어렵다. 아마도 남은 한해의 절반도 소리 소문 없이 지나갈 거였다.

빠른 시간의 흐름을 생각할 새도 없이, 남쪽으로 다시 발품을 판다. 이즈음의 남도는 수더분한 처자의 모습을 닮았다. 수목은 우거지고 산야는 푸르다. 어느 곳에 눈을 두어도 정겹고 속정이 묻어난다.

새해 들어 전라도 정도 천년을 맞아 역사 속 남도의 인물을 만나왔다. 오늘의 남도는 그들로부터 진 빚이 많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빚진 자의 마음으로 이번 길도 타박타박 재촉한다.

무안 초의선사 탄생지. 아니 초의선사 유적지라 해야 될 것 같다. 탄생지든 유적지든 초의선사(草衣禪師)의 숨결이 오붓이 남아 있는 곳이어서 무엇으로 불려도 무관할 듯하다. 어쩌면 무안(務安)이라는 지역과 가장 닮은 인물이 초의선사인지 모른다. 미세한 해안이 부려놓은 조화와 초의의 정신적 유산이 결부돼 오늘의 무안을 일군 토대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명이 잉태되는 지점에는 수려한 자연과 세상을 흔들어 깨울 사상이 침윤돼 있으니 말이다.

‘초의’(草衣)라는 뜻 앞에서 잠시 침묵한다. ‘풀옷’이라는 뜻이다. 스승인 완호 스님이 지어준 법명으로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건방지게 까불지 말고 항상 풀옷을 입은 사람같이 소박하라”는 의미다. 불교적 관점에서 진정한 하심(下心)이다. 귀기 어린 천재성과 팔방미인 재주를 은닉하라는 뜻이 두고두고 귓가에 어린다.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 그의 유적지, 아니 탄생지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차향(茶香)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초의선사를 논할 때 차(茶)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초의와 다산은 차를 매개로 우의를 견지했던 지음의 관계다.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선사인 두 사람에게서 찻물같은 은은한 향기가 환기되는 건 그 때문이리라.

유적지 앞에서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발길을 옮긴다. 그다지 넓거나 좁지 않아 해찰을 부리듯 걸음을 걸으면 한 시간 정도면 족히 구석구석을 톺아보고도 남는다. 이곳에서 시공간을 뛰어넘어 생생하게 다가오는 초의선사를 만난다. 지난 1998년부터 2014년까지 진행된 ‘탄생지 유적 현창(顯彰·밝게 나타냄)사업’ 일환으로 이곳 8만8695㎡부지에는 다성사, 생가, 기념관, 보제루 등 모두 16동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초의선사는 1786년(정조 10)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에서 태어나 1866년(고종 3)에 입적했다. 법명은 의순(意洵)이며 자는 중부(中孚), 호는 언급한 대로 초의(草衣)다. 그를 일컫는 일반적인 말은 대선사, 다성(茶聖)이다. 다도를 널리 알렸으며 해남 대둔사 13대 종사였기 때문이다.

고문헌에는 그가 법문에 들게 된 것과 관련한 일화가 전해온다. 내용인즉 이렇다. 어린시절, 강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졌던 모양이다. 때마침 인근을 지나가던 스님에 의해 간신히 목숨을 구하게 된다. 이 일로 소년은 열다섯 되던 해 나주시 다도면에 있는 운흥사를 찾아간다. 벽봉 민성스님께 의지해 출가를 하게 이른다.

입구에 들어서자 차밭이 보인다. 그리 넓지 않은 차밭은 하오의 햇볕을 받아 반짝인다. 푸르다기보다 불그스름한 빛이 감돈다. 관리사무소에 물어보니 “봄에 찻잎을 따고 장마가 지기 전에 한번 전지를 해주기 때문에 그렇다”며 “지금부터 가을까지 찻잎이 나면 이듬해 봄에 몇 차폐 찻잎을 또 딴다”고 말한다.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간다. 모든 게 순서가 있고, 나름의 법도가 있는 법. 초의선사에게 차와 선이 별개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그는 “모든 법이 다르지 않으며”(諸法不二), “평상심이 곧 도”(平尙心是道)를 일상에서 견지했다. 그러나 초의선사의 이 같은 사상은 당시 백파(白坡) 대선사와의 논쟁을 촉발했다. 초의가 선과 교 어느 하나만을 지향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고 피력한 데 비해 벽파는 선과 교는 별개의 체계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초의선사는 차와 선 또한 동일한 관점에서 보았다. 한마디로 다선일미(茶禪一味)다. 알려진 대로 그는 차를 마시며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초의선사가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책 ‘동다송’(東茶頌)에는 차에 대한 예찬이 수록돼 있다. 차의 효능, 덖고 마시는 법 등 차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 있어 차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권할 만 하다.

여기서 잠시 초의선사가 출가를 한 이후의 행적을 좇아가보자. 나주 운흥사로 출가 후 그는 불경을 공부하고 19세(1804) 되던 해 영암의 월출산에 올라 큰 깨달음을 얻는다. 기봉의 산세 뒤로 솟아오르는 달을 본 후 가슴에 맺힌 무엇이 시원히 풀렸다고 전해온다. 그에게서 도인의 풍모가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일화와도 무관치 않다.

그 길로 청년 의순(초의)은 해남으로 발길을 향한다. 대흥사 제9대 강사인 완호 스님을 알현하고 구족계를 받는다. 초의라는 호도 이때 받았다고 하니, 그의 불심과 학문의 깊이를 가늠하게 한다. 그곳에서 그는 경전을 배우고 탱화를 그리며 학문과 불도에 정진해 고승대덕의 경지에 오른다.

39세에는 일지암을 중건해 수행처로 삼았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은거하며 다도에 관한 책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펴낸다. 이밖에 많은 시문을 남겼고 문집을 엮어냈다. 1840년 그의 나이 55세 때에는 헌종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선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나이 81세, 법랍 65세인 1866년 초의선사는 가부좌를 틀고 홀연히 입적을 한다. 하룻밤을 몸져누웠다가 일어난 후다. 불문에 몸담고 있었으나 정약용, 김정희 등 당대의 유학자들과 폭넓은 교분을 나누었던 선승은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무안=임동현 기자 idh@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