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달이는 부뚜막 ‘다조’(위).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길에 펼쳐진 ‘뿌리의 길’은 다산의 고뇌와 민초들의 분노가 얽혀 있는 듯 보인다.

누리령 잿마루에 바위가 우뚝한데

길손이 눈물 뿌려 사시사철 젖어 있다

월남을 향하여 월출산은 보지 마소

봉마다 모두가 도봉산이라네

(중략)

눈처럼 새하얀 새로 짜낸 무명베를

이방에 낼 돈이라고 졸개가 와 뺏는구나

누전의 조세를 성화같이 독촉하니

삼월 중순에 세곡선 서울로 떠난다고…

<정약용 ‘탐진촌요’ 중에서>



‘탐진촌요’는 정약용(1762~1836)이 강진 유배시절에 지은 시다. 제목이 암시하듯 곡만 붙이면 노래를 부를 수 있을 만큼 운율이 느껴진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쓸쓸하면서도 빈한하다. 유배의 고통을 안으로 삭이는 선비의 심사가 전해온다.

‘탐진’(耽津)은 강진의 옛 이름이다. ‘탐진촌요’는 정약용이 유배지였던 강진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한편으론 농촌의 피폐한 실상을 알리기 위해 지었던 작품이다. 다산은 경제치용을 주창한 조선후기 실학자로 자는 미용(美鏞)이며 호는 다산(茶山), 여유당(與猶堂)이다.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던 조선 최고의 실학자였다. 그러나 시운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정조 죽음 이후 가해진 천주교 박해와 보수적인 노론 벽파의 정치 지형은 그의 일가를 사지로 내몰았다. 다산 또한 변방의 낯선 지역으로 유배되는 멸문지화의 운명에 처해졌다.

정약용의 발자취는 강진 귤동마을(도암면 만덕리)에서 시작된다. 마을은 소담하고 아늑하여 작은 둥지의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과연 이곳이 다산의 유배지였을까 라는 의구심마저 갖게 한다.

다산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상상해본다. 아마도 외지인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눈빛은 차가웠을 것이다. 여기에 유배 온 사람은 큰 독소(大毒)로 치부되던 시대였다. 한때는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던 당대 최고의 학자가 아니던가.

유일하게 동문 밖의 주막집 노파가 다산을 가련히 여겨 방을 하나 내주었다. 노파는 첫눈에도 그가 보통의 선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산은 노파가 건네는 탁주 한 사발을 마시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을 거다. 그리고 내면 깊이 밀려드는 상실과 허허로움을 다잡았다.

노파의 혜안은 후일 다산이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권의 책을 기술하고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하는데 밑바탕이 됐다. 노파의 측은지심이 바로 애민 사상이다. 다산이 펼치고 설파하고자 했던 사유의 근원이며 오늘 우리가 견지해야 할 ‘낮은자’에 대한 배려다.

그러므로 지위의 고하로, 소유의 다소로, 사람을 재단하고 하대해서는 안 될 이유를 그 노파의 혜안은 말해준다. 오늘 우리의 정치권이 주창하는 국민민복, 민생은 멀리 있거나 지극히 고상한 게 아니다. 빼앗긴 자, 잃어버린 자에 대한 연민과 도움이 구휼이며 소통이다.

정약용은 노파가 내준 방을 사의재(四宜齋)로 명명하고 그곳에 자신을 다시 유폐시켰다. 이름하여 마음의 감옥. 다산은 그 방에서 조선을 품고 우주를 품었다. ‘생각은 맑게, 용모는 단정하게, 말은 과묵하게, 행동은 진중하게!’ 네 가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화두 삼아 학문에 정진했다.

다산초당으로 향한다. 이곳에 올 때면 늘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게 된다. 유배자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길은 깊고 아늑하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뿌리의 길’이 있다. 완만한 곡선의 길은 수백 년 된 소나무의 뿌리로 가득해, 길은 언제나 살아서 꿈틀거리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면 길은 작은 바람에도 울며 솟구친다. 마치 김수영의 시 ‘풀’과 같은 느낌을 준다. 작은 발자국 소리에도 귀를 세우며 흔들리는 저 뿌리는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일러주는가.

‘뿌리의 길’에는 다산의 고뇌와 민초의 분노가 얽혀 있을 거였다. 그 길에서 곡진하면서도 가없는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의 내면 가득히 움트는 단단한 뼈를 보는 것이다. 정약용은 알고 있었다. 다시는 한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이곳에서 ‘뿌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음을 모르지 않았다. 스스로 뿌리가 되고, 길이 되는 것만이 민초를 향한 유일한 사랑의 방식이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폐족(廢族)이다. 폐족이 글을 읽지 않고 몸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 구실을 하랴. 폐족이라 벼슬은 못하지만 성인(聖人)이야 되지 못하겠느냐, 문장가가 되지 못하겠느냐?”

차 달이는 부뚜막 ‘다조’에서 다산이 자식들에게 보낸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떠올린다. 약천의 물을 받아 찻물을 우렸을 다산의 모습이 그려진다. 차를 끓이며 생각을 정리하고 아들들에게 보낼 편지를 구상했을, 지극히 소탈한 모습을 가늠해본다. 어쩌면 다산이 가장 다산다울 때는 이 곳에서 찻물을 우려낼 때가 아닌가 싶다. 비록 자신의 일가를 폐족이라 칭했지만, 그는 그 불온함과 냉대를 딛고 ‘조선의 레오나르도다빈치’로서의 삶을 살았다.

수많은 담론이 펼쳐진 동암은 다산의 학문과 문예가 꽃핀 현장이다. 다산은 이곳에 2000여 권의 책을 갖추고 학문에 정진했다. 정치, 경제, 철학, 역사, 문학, 의학 등 다방면에 걸쳐 토론이 이뤄지고 학문이 교류됐다. 막힘없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의 사유는 수시로 텍스트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곧 있으면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입지자들은 모두 자신이 적임자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한번쯤 다산의 위민과 청렴의 정신을 떠올렸으면 한다.“이방에 낼 돈이라고 졸개가 와 뺏는” 그런 파렴치한 행위를 하려거든 아예 포기를 하는 편이 낫다. 정말로 공직에 뜻이 있다면 꼭 다산초당에 들르시길. 그리하여 유배 가운데서도 위민을 견지했던 다산의 높은 뜻을 벅벅이 되새겼으면 한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