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옛 지명은 달과 연관돼 있다. 백제시대에는 월내(月奈)군, 고려 성종 때에는 낭주(朗州)군이라 불렸다. ‘달 밝은 고을’이라는 의미다. 995년부터 1018년까지는 지방행정기구인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소재지이기도 했다. ‘신령스런 바위’라는 뜻의 영암(靈巖)이라는 지명은 1096년(현종 9년)때부터 비롯됐다. 구림마을에서 월출산 위로 솟아오르는 달을 바라보면 왜 옛날부터 이곳에 달과 관련된 지명을 붙였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명산과 바다, 포구를 두루 품은 구림마을은 민휴공 최지몽(907~987) 선생을 비롯해 왕인박사, 도선국사, 형미.경보.수미 선사 등 큰 인물을 배출했다.



◇문중에서 유허비.사당 세워 추모해=1000여 년 전 인물인 민휴공(敏休公) 최지몽 선생의 흔적을 현재 영암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그나마 낭주 최씨 문중에서 세운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 왕인박사 유적지내 ‘유허비(遺墟碑)’와 서구림리에 위치한 사당 ‘국암사’(國巖祠)에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최기욱(74) 전(前) 영암향교 전교(전남 향교전교협의회 회장 역임), 김희석(70) 왕인학당 훈장과 함께 관련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지난 2001년 건립된 유허비는 돌거북 등위에 우뚝 서있다. 오석에 새겨진 비문은 “호남은 오동지일대방면(吾東之一大方面)이요, 영암은 호남중수려고치(湖南中秀麗古治)다”라는 문장으로 운을 뗀다. 그리고 민휴 공이 왕건을 처음 만나 닭과 오리가 한 둥지에 있는 꿈에 대해 ‘삼한 통일’이라는 해몽을 하고, 이후 어떠어떠한 활약을 펼치다 세상을 떠났는지 일생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1972년 낭주 최씨 문중에서 주도해 건립한 국암사는 민휴공을 주벽(主壁)하고, 후손인 죽계 최안우, 덕암 최운, 묵암 최진하, 양오당 최몽암을 배향(配享)하고 있다. 민휴공이 돌아가신 음력 3월 초이튿날에 맞춰 매년 문중에서 제향을 지내고 있다. 사당 내에는 아쉽게도 민휴공 영정은 모셔져 있지 않고 위패만 놓여있다.

“일제가 펴낸 ‘전선(全鮮)명승고적’이라는 책에 보면 황해도 ‘려태조영전’(麗太祖影殿)’ 항목에 ‘재(在) 미두산이라 동서 벽에 화(畵) 37공신12장군상(像)하다’라고 기록돼 있어요. 37명의 개국공신과 12명의 장군 초상이 모셔져 있었다는 거죠.”

최기욱 전 전교의 설명이다. 낭주 최 씨 문중은 혹시 북한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민휴공의 영정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후손들은 최근의 남북 해빙 분위기를 누구보다 반기며 선조의 영정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고 있다. 민휴공이 돌아가신 후 가문에서 8년간 사당에서 위패를 모시고 있다가, 성종 13년(994년)에 ‘경종 묘정(廟庭)에 배향을 했다’라고 고려사에 기록돼 있다.

또한 민휴공의 묘소 역시 남아있지 않다. 다만 족보에 ‘영암 북십리’(北十里)라고 기록돼 있는 것을 토대로 덕진면사무소 인근에 묘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중에서 묘소로 유력한 대밭 한 곳을 시굴해 보기도 했으나 아무런 유물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쪽에 최 정승 묘가 있다고 구전으로 내려와요. ‘염소가 누워있는 형국’에 묘를 썼다고 합니다. 나중에 고려가 망하니 (묘소에 세워져있던) 비석도 빼서 노두해버렸다고 그래요.”

◇도선국사 바위와 최지몽 사당 나란히 자리해=이처럼 후손들이 민휴공 묘소를 잃어버린 까닭은 조선 건국과 관련돼 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이 세워질 때 죽계 최안우 공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二君不事)면서 나주시 봉황면 만봉리 산속에 은둔해 버렸다. 태조 이성계가 벼슬을 내리며 회유해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죽계는 형제(운, 방)를 슬하에 뒀고, 형인 최운 공이 6형제를 낳았다. 이들이 6파를 형성됐는데 이 가운데 두 파가 소멸되고, 나머지 네 파가 낭주 최씨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한다. 현재 영암 관내에 8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국암사앞 국암서원에는 ‘낭주덕성’(朗州德星)과 ‘덕성당’(德星堂) 현판이 걸려있다. ‘덕성’은 중국 산동성에 있는 한 마을 이름으로, 제나라에서 건너온 낭주 최씨의 정체성을 담고있다.

국암사 왼쪽에는 큼지막한 바위가 놓여있다. ‘국사암’(國師巖)이다. 국사암은 도선국사(826~898)와 연관돼 있다. 도선국사와 관련된 바위와 민휴공 최지몽의 사당이 마을내에 인접해 자리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본래 거북이 구(龜)자 바위암(巖)자 ‘구암 바우’, 즉 거북바위입니다. 그것이 도선국사가 국사(國師) 호칭을 받은 뒤로 국사암이라고 바뀌었죠.”

구림(鳩林)이라는 지명 역시 도선국사 탄생설화에서 나왔다. 성기동에 사는 한 처녀가 빨래를 하다가 물에 떠내려 오는 푸른 오이를 먹고 태기를 느꼈다. 이후 아들을 낳았는데 부모가 숲속 바위에 버렸다. 사흘 후에 가보니 비둘기들이 갓난아기를 덮어 보호하고 있었다. 이 아이가 훗날 도선국사다. 이후 ‘비둘기들이 숲속에서 아이를 길렀다’하여 마을이름을 구림이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디지털 영암문화대전 ‘구림마을’ 명칭 유래)

◇후손들, 요월당 복원과 현창사업 바라=국사암에 올라서면 월출산 산줄기가 시원스레 눈앞에 펼쳐진다. 바위에는 군데군데 원추형 성혈(聖穴)이 뚫려있다. 아이를 못낳는 마을 아낙들이 치성을 드리면서 갈아 만들었다는 민속신앙 흔적이다. 바위는 옆에서 바라보면 영락없는 거북이 머리를 하고 있다.

바위앞에는 조선 중기에 요월당이라는 정자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 월당(月堂) 임구령 선생이 세운 요월당은 맞을 요(邀)자에 달월(月)자를 쓰는데 문자그대로 달을 맞이하는 정자라는 의미다. 월출산에 달이 뜨면 하늘과 술잔, 연못, 거울 등 5곳에 달이 뜬다고 하니 얼마나 운치있는 정경인가?

요월당에 관련된 왜구 이야기가 전해진다. 임진왜란 전, 왜구가 구림을 쳐들어와 약탈하며 요월당에 불을 놓았다. 그런데 요월당에 걸려있는 현판 시구에 매료돼 불을 급히 끄고 그중 현판 2개를 떼 갔다는 이야기다.

김희석 왕인학당 훈장은 “동계리, 서호정, 남송정, 북송정 등 구림의 지명은 국사암을 기준으로 정해졌다”면서 “영암의 문화는 구림의 문화”라고 강조했다. ‘삼면청송일면계’(三面靑松一面溪)로 시작하는 구암 임호 선생의 시구에서 ‘일면계’는 상대포앞 바다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최기욱 전 전교는 “민휴공 할아버지는 고려를 달빛같이 밝게 만드신 분”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비단같은 할아버지의 손(孫)이 미약해서 마땅히 대접을 받을 분(민휴공)이 지금 대접을 못받고 있다. 왕인박사도, 도선국사도 중요하지만 민휴공 할아버지도 같이 성역화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영암=문병선.전봉헌 기자 jbh@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