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뮌헨을 뒤로 하고 다음 행선지인 뒤셀도르프로 가기 위해 뮌헨역으로 향했다. 호텔에서 역까지 택시를 타기에는 애매한 거리였다. 역까지 걸어서 가는 것을 선택했고 캐리어를 끌고 배낭을 메고 우산을 쓰고 이동하는데, 마치 유목민처럼 느껴졌다.

몸은 이미 바쁜 마음을 알았는지 금세 헐떡거렸다. 역 안 휴식 공간에서 잠시 짐을 내려놓고 숨을 고른 후 시간을 체크했다. 이 때 어디선가 피아노로 연주하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가 흘러 나왔다. 음악은 피로회복제를 마신 것처럼 여행의 고단함을 날려 주었다. 역 안에 누구든지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20대로 보이는 한 여성이 연주를 했다. 누군가의 요청이 아닌, 자발적인 연주였다. 이 여성은 어디론가 이동하기 위해 역에 들렀다가 피아노를 치고 연주가 끝나자 가고자 하는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별것 아닌 것 같은데, 단지 피아노 하나가 있고 없고 일 뿐인데 왜 이렇게 넉넉함과 여유를 주는 걸까? 역에서 듣는 피아노 연주는 예술이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 속에 가까이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예술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기차를 탔다. 창밖의 아름다운 풍광들을 보면서 ‘엘리제를 위하여’를 흥얼거리고 차분히 마음을 내려놓았다. 뒤셀도르프에 도착해 짐을 풀어 놓고 라인강변으로 향했다. 강바람은 나를 상쾌하게 맞아 주었고 크고 작은 배들은 오래도록 강가에 머물러 있었다.

뒤셀도르프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도시 전체가 거의 폐허가 된 후 건물 상당수를 보수했고 독일의 다른 어느 도시보다 새 건물이 많이 지어진 곳이라고 했다. 라인강변에는 이름높은 건축가들의 뛰어난 건축물뿐만 아니라 자연과 어우러진 공공미술이 이곳저곳에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뒤셀도르프만의 넉넉함이 느껴졌다.

다음날, 뒤셀도르프에 오게 된 목적 중 하나인 인젤 홈브로히 뮤지엄을 찾아갔다. 여행은 늘 목적지를 찾아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이 과정은 힘이 들기도 하지만 그 속에 바로 재미가 있다. 기차 시간을 확인하고, 한참을 기다리고, 또 다시 내릴 곳을 확인하고 방향을 물어물어 도착한 인젤 홈브로히 뮤지엄은 약 20만 평의 숲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미술관을 거닐며 ‘자연만큼 위대한 미술관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숲속에서 수달도 만났다. 인젤 홈브로히 뮤지엄은 먼 길을 찾아온 보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뮤지엄의 입장료에는 점심 비용이 포함돼 있었다. 숲 속에서의 점심은 소풍이 따로 없었다. 도심에서 만난 뒤셀도르프 K20, K21도 이 도시를 대표하는 세계적 위상의 미술관이었다.

이번 여행은 전체적으로 아트투어였지만 도시의 역사와 문화 지형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뒤셀도르프의 문화 지형은 견실하고 풍성했다. 그런데도 여기서 멈추지 않고 도시 곳곳의 공공미술 부분에 많은 공을 들일 계획이라고 했다.

트램을 타고 이동하며 가는 곳마다 수많은 공공미술을 만났다. 벽화는 벽화대로, 조형물은 조형물대로, 건물은 건물대로 하나같이 특색이 뚜렷했다. 작품 하나 하나가 좋은 선택으로 이루어진, 완성도가 높은 결과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도시가 갖고 있는 수많은 매력 중에는 좋은 자연 환경과 높은 시민의식이 있다. 게다가 좋은 발상의 공공미술까지 더하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었다. 꼭 있어야 했고 있어서 더욱 빛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 색감과 형태가 독창적이면서 조화를 이룬 존재들이었다.

나는 이런 도시 이미지를 담기 위해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진을 찍어댄 이유는 공공미술의 성공사례를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광주 공공미술의 현주소가 자연스레 떠올라 같이 동행한 지인과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왜 우리의 공공미술은 억지스럽고 영혼이 없어 보이는가?” “몇몇이 독점하고, 맥락도 없는 공공미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솔직히 우리나라에서 공공미술 작업을 한다고 하면 무섭다. 만신창이를 만들잖아. 소꿉놀이처럼 알록달록하게 이쁘게만 만들겠지. 공간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공공미술은 공해라고 하지 않았던가?” 등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다. 마치 광주의 모든 일들을 짊어진 사람처럼 걱정이 들었다.

앞으로도 공공미술은 계속 진행될 것이다. 상상이 죽으면 공공미술도 죽는다고 생각한다. 발상을 전환하는 힘이 없는 공공미술은 퇴출시키자. 영혼이 담긴 오랜 생각 끝에 나온 결과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어내는 의미 있는 결과물이 자리하길 기대해 본다.

한 걸음 한 걸음 느리게 가더라도 바르게 가면 언젠가는 광주만의 특징으로 도시의 이미지를 인식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친절을 내 안에 품고 있어야지 진짜 친절한 것처럼 상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내 안에 품고 살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정광희 프로필

-호남대학교 미술학과 서예전공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조형예술학과 한국화 전공

-‘먹을 쌓다’(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광주)외 개인전 8회

-‘진공묘유’(眞空妙有·뉴욕)

‘Korea Tomorrow’(성곡미술관·서울) 외 다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