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선비가 있다. 오늘날로 치면 고위직 공직에 있던 사람이다. 전라도 관찰사(도지사), 형·예·공조판서(장관), 한성판윤(서울시장) 등을 역임했다. 한마디로 명문가의 요건을 갖췄다.

그러나 선비의 고향집은 비가 셌다. 비가 오면 초가는 줄줄 셌다. 더 황망한 것은 지체 높은 그 양반이 돌아가신 후에 벌어졌다. 고향으로 내려올 장례비도 없어 그 비용을 누군가 대야 했다.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1491∼1554). 청빈한 삶을 몸으로 실천했던 그는 청백리의 표상이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지 않고 공도(公道)를 견지했다. 한성판윤까지 지냈지만 죽은 후에는 가족들이 상여를 메고 고향에도 가지 못할 만큼 곤궁했다.

그와의 대면은 늘 삶의 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소유적 삶보다는 존재론적 삶을 지향해야 함을 일깨운다. 박수량의 생은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강조했던 ‘청렴’의 본보기와 상통한다.

박수량의 탯자리는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아치실)이다. ‘아곡리’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또 한사람 있다. 바로 의적 홍길동이다. 박수량과 홍길동은 서로 활동했던 시대는 다르지만 각기 청렴과 의로움을 삶의 모토로 삼았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도학과 절의와 문장의 표상인 하서 김인후가 있다.(아곡리와 가까운 맥동마을이 김인후의 탯자리이다)

이들은 황룡면이 배출한 장성의 인물이자 남도를 넘어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색이 없다. 황룡에 내재한 황색이 주는 아우라는 그리 간단치 않다. 황색은 깊고 질박해 다소 거칠어 보이지만 속은 더없이 부드럽고 담박하다. 이 색은 보이는 것보다 많은 것을 품고 있는데 생명의 가치, 공존의 가치를 담고 있다. 그 때문인지 모른다. 황색은 아니 주황은 정열의 빨강과 그보다 살갑고 옅은 분홍보다 훨씬 인간적이며 따뜻하다.

러시아 출신 화가 칸딘스키는 색채를 통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주황은 자기 힘에 자신을 가진 사람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건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황룡면에 들어서면 옐로우가 주는 색의 마력에 취하게 되는 이유다. 그러므로 오늘의 장성을 만든 것은 황색이다.

박수량은 151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24세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성균관 분교인 광주 주학교수로 임명됐다. 이후 승문원 부정지, 예조좌랑, 사간원, 형조정랑을 역임했다. 41세 때는 모친의 봉양을 위해 보성군수에 부임했지만 얼마 후 승무원 판교, 호조참판에 임명됐다. 1542년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 상(喪)을 치른다. 한동안 편두통으로 공직에서 떠나 있다가 1547년 한성판윤에 임명된다. 39년의 공직생활 동안 그는 중종실록, 인종실록을 편찬하고 6조판서를 두루거쳤다.

황룡면에 오면 그의 자취를 찾기 위해 가는 곳이 있다. 그의 묘 앞에는 이름없는 백비(白碑)가 서 있다. 성도, 이름도, 내용도 없는 깨끗한 비는 푸른 소나무 숲에 둘러쌓여 있을 뿐이다. 한적하면서도 고요한 이곳에 서면 번잡한 생각들은 저만치 물러간다.

백비 하나로 박수량의 삶은 온전히 집약된다. 백비는 벼슬이 아닌, 관직이 아닌, 무엇보다 내가 누구였는지 말하지 않는다. 단지 어떻게 살았는지를 무명의 비로 증명하는 것이어서 출세와 치적을 일삼기에 바쁜 오늘의 세태를 부끄럽게 한다.

후일 하서 김인후는 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절의와 학덕을 갖춘 하서는 동향의 선배에 대한 예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금빛처럼 아름답고 옥처럼 단아한 자태, 안으로는 학문을 쌓고 밖으로는 행동을 자제했네, 몸가짐은 검약하고 낮춰 남을 받드니, 사귐에 해로움이 없었네, 영화가 조상까지 미쳤고, 공이 죽은 후에 특이한 은총이 미쳤으니, 이 경사 이어받아 길이길이 변함없이 보전해 보세.”

청빈한 삶을 살다 죽은 박수량을 위해 명종은 장례비를 내렸다. 그리고 백비와 청백당을 하사했다. 신하의 청렴결백함을 알면서도 비(碑)에다 새삼스럽게 무언가를 쓰는 것은 청렴함을 잘못 아는 결과가 될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황룡면 아치리 박수량 생가에는 청백당이 들어서 있다. 현판은 명종 임금이 박수량 사후에 99칸 청백당을 하사할 당시의 현판이라고 한다. 현재의 청백당은 전통한옥숙소로 건립돼 군민들뿐 아니라 외지인에게도 각광을 받고 있다.

백비와 청백당을 돌아 나오면서 참선비 박수량을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청렴, 근신, 측은지심은 국가의 녹을 받는 자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박수량은 없지만 그의 정신은 오늘의 선비의 고장, 장성을 만들었다. 이름도 빛도 없이 백성을 섬기던 청백리가 그리운 시절이다. 누구에게나 흠결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물욕에 물든 오늘의 세태는 자정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전국 곳곳에서 공직에 진출하기 위해 이전투구가 벌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입지자들은 자신이 자리에 합당한 사람인지를 자문해야 하지 않을까. 청백리의 표상이 될 것인지, 부패한 관료가 될 것인지, 무능한 정치꾼이 될 것인지는 오로지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선거에 나온 모든 입지자들이여, 잠시 일정을 접고 이곳 백비가 있는 곳에 들르시오. 후일 당신들의 비문에 무엇이 기록될지, 진지하게 생각들 해보시오.”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