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암서원, 옐로우시티, 홍길동, 박수량….

장성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이들 이미지는 모두 황룡강이라는 특정 공간으로 수렴된다. 황룡강은 장성의 젖줄이자 영산강의 제1지류로 호남의 곡창을 살찌우는 생명의 강이다. 노란 들녘을 물들이는 황색의 이미지는 선비의 고장 장성을 격조 있고 풍요롭게 한다. 황룡강과 인접한 필암서원이 선비의 고장 장성의 대표 공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황색의 봄볕을 받으며 필암서원에 들어선다. 이곳은 호남 인문의 집결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면면히 이어져오는 조선 선비의 문향을 느낄 수 있다. 곳곳에서 김인후의 인품과 학덕이 시공을 초월해 오늘, 현재의 시간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목도한다. 고졸한 분위기에 소란스러운 바깥세상의 소음은 저만치 사라진다.

당초 필암서원은 1590년 장성읍 기산리에 세워졌지만 정유재란 때 소실돼 1624년에 다시 지어졌다. 이후 효종 10년(1659)에 필암서원으로 사액됐으며 1672년 지금 위치로 옮겨졌다. 사액을 받았다는 것은 조정의 신뢰가 두텁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액(賜額)은 “임금이 사당, 서원(書院) 등에 이름을 지어서 그것을 새긴 액자를 내리는 일”을 일컫는다. 나라의 공인을 받아 현판(懸板), 노비 등을 하사받았으니 교육기관으로서의 엄정한 지위와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서원은 오늘날로 치면 지역의 명문 사학에 다름 아니다. 어느 시대든 배움에 대한 갈망, 나아가 입신양명의 열망은 인간의 본능인지 모른다. 서원에 깃든 학풍에서 오늘의 교육 열풍을 가늠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곳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로 전면에 학당이, 후면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 있다. 배움과 배향을 함께 한다는 의미가 조화롭게 구현돼 있다. 서원 내에는 수업이 이루어지는 청절당, 학생들의 기숙사라 할 수 있는 생활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한다. 일반적인 서원은 외삼문을 들어서면 동재와 서재가 보인다. 그러나 필암서원에서는 사당과 강당 사이에 동재와 서재가 위치한다.

서원의 기능은 제사와 교육으로 집약된다. 배향된 인물을 기리고 학풍을 이어가는 것이 존립의 근거다. 당시에도 교육열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서원은 지금으로 말하면 사립 고등학교에 해당된다. 조선시대에는 지방에 국립교육기관인 향교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교육열을 다 충족시킬 수 없었다.

부모들은 앞 다투어 자녀들을 서원에 보내려고 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공부를 해야 나중에 성균관에 진학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시대를 초월해 교육은 모든 부모의 큰 관심거리 가운데 하나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15일제 수업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보름 만에 각자 공부한 내용을 가지고 스승과 마주한 상태에서 문답식 토론을 했다고 해요. 시간 때우기나 겉핥기가 아닌 제대로 된 공부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지요. 오늘날과 같은 단순한 외우기나 사지선다형 공부로는 과정 자체를 따라갈 수 없지 않았을까 싶어요.”

김채림 전남문화관광해설사의 말이다. 이어 김 해설사는 “서원의 교육은 지금의 5일제와는 다른 시스템이었다”며 “전인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가 갖춰져 있었다”고 덧붙였다.

한편으로 서원을 중심으로 한 유생들의 활발한 교류는 자연스런 여론의 결집으로 이어졌다. 지방 곳곳에서 수재들이 모이다 보니 그들만의 리그가 결성되었을 터다. 여론이 모이는 곳은 당연히 세가 결집되고 편 가르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 적잖은 서원이 교육의 본래적 기능과는 무관하게 정치적인 성향을 드러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더러 토지를 소유하고 면세·면역의 특전을 누리면서도 붕당을 일삼기도 했다. 본래의 기능과 동떨어진 행태가 무시로 나타났고 심지어 양민을 토색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1868년 흥선대원군은 서원 철폐령을 내린다. 전국의 47곳만 남기고 문을 닫게 했다. 지금의 학교를 폐교하는 기준과는 다소 동떨어진 면이 없지 않으나 폐단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모양이다.

필암서원은 통폐합의 위압에도 불구하고 독자 생존할 수 있었다. 본래의 학풍을 진작하고 배향 인물을 기리는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얘기다. 본질적인 역할을 벗어났다면 당시의 외풍에 휩쓸렸을 거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현재 필암서원, 정읍 무성서원을 비롯한 9개 서원이 세계유산 등재 신청이 된 상태다. 2017년 9월 등재신청서 초안이 유네스코에 제출돼 있다. 이는 한국의 서원이 지니는 특이성과 차별성이 세계인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는 방증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는 오는 9월 현지 실사를 할 계획이며, 2019년 7월에 세계유산위원회 등재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봄볕이 다사롭게 들이치는 서원을 돌아 나오며, 장성의 큰 인물 하서를 생각한다. 그의 고매한 인품과 학문의 경지가 오늘의 장성의 정신을, 아니 남도의 정신을 떠받치고 있음을 실감한다.

“뿌리 가지 잎새 마디 모두 다 정미롭고/ 굳은 돌은 벗인양 법위 속에 들어있네/ 성스러운 우리 임금 조화를 짝하시와/ 천지랑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셔라”

위 시는 김인후가 인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묵죽도에 써 넣은 작품이다. 언급했다시피 인종은 세자 시절 김인후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후일 인종은 직접 그린 묵죽도를 그에게 하사한다. 김인후는 묵죽도에 군신의 예를 시로 표현했는데, 묵죽도에는 대나무와 바위가 그려져 있어 군신의 도타운 예와 절의를 느끼게 한다.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