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앞에서 몇 초만 기다리는 것도 긴 시간인양 참지 못하는 속도전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슬로베니아는 그야말로 느림과 치유, 회복을 맛보게 하는 곳이었다.

발칸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동유럽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슬로베니아.

전라남북도를 합친 정도의 크기로 한반도 면적의 10%도 되지 않는 작은 나라지만 ‘알프스 햇살의 축복을 받은 나라’라고 불릴 만큼 자연 경관이 뛰어나다. 수 백년 동안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가슴 아픈 역사가 있음에도 문화와 전통을 잘 보존해 온 뚝심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총 인구수가 203만 여명에 불과하지만 자원이 풍부하고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교육 수준 또한 높다.

SLOVENIA 나라 이름에서도 ‘LOVE’ 라는 단어가 숨어있고 또 ‘사랑스럽다’는 의미를 가진 수도 류블라냐를 봐도 그렇고 슬로베니아는 과거 압제하의 박해에 대한 상처를 이겨내는 사랑이 견고하며 지금도 그러한 사랑이 묻어나는 곳이다.

수도 류블라냐에서는 광장을 중심으로 잔잔하게 흐르는 강을 보며 노천 카페에서 마시는 맥주 한잔이 한국의 가을 햇살과 비슷한 슬로베니아의 가을 오후를 더욱 깊이 만끽하게 해준다. 28년의 결혼 생활 중 어머니를 모시는 탓에 명절에도 가족여행 한 번 가지 못하고 늘 친척들 대접을 해야만 했던 아내에게 작년 긴 추석 연휴는 드디어 남편 노릇을 제대로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내에게 8박 9일의 발칸 3개국 여행을 서프라이즈 선물로 준비했다.

아내는 기뻐하면서도 남은 가족들과 명절 때 자리를 비우는 것을 미안해하며 이전 명절보다 더 세심하게 주변을 살피며 여행준비를 하였다. 28년 만에 처음으로 긴 시간 단둘이서 떠나는 여행은 꼭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어도 우리 부부의 마음에 깊은 감동이 올 수밖에 없었을 텐데 슬로베니아는 아내에게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듯 말문을 막는 감동을 주었다.

소문난 그곳, 블레드 호수와 블레드 성으로 달려 갔다. 블레드 호숫가에 서자 말문이 턱 막혔다. 온통 주변이 엽서의 풍경 그 자체였다. 카메라 자연의 경관이 나를 붙들었다. ‘알프스의 눈동자’라는 별명을 괜히 얻은게 아니구나 라고 인정되는 블레드 호수. 셔터를 누르는 것도 잠시 멈추는 게 낫겠다싶을 정도로 경이롭고 아름다운 그 경관. 그 아름다운 호수의 빛은 설명하기도 싫다. 가서 직접 보지 않고서는 몇 마디 말로 그 아름다움을 흐릴까 싶다. 그 아름다움은 분주한 우리의 마음을 차분히 다잡고 조물주의 솜씨에 마음 깊이 경외심을 가지게 했다.

이제 그 아름다운 빛깔의 호수를 직접 탐해본다. ‘플레타나(pletana)’ 라고 불리는 나룻배를 타고야만 호수를 건너 블레드 섬에 들어갈 수 있다. 플레타나 뱃사공의 연령대는 다양한데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2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 직업은 가문을 이어 내려오는 선택받은 사람들만 할 수 있단다. 사공들의 자부심이 대단한 것이 벌이도 상당한 듯 했다. 대부분 뱃사공들은 한국인들을 많이 상대한 탓인지 한국어로 우리에게 재미를 준다. 젊고 유쾌한 뱃사공은 배를 타고 내릴 때의 안전수칙을 짤막하지만 한국어로 소개하고 뱃놀이 민요를 부르며 우리로 떼창을 하도록 유도하기까지 했다.

10여 분간을 아름다운 호수를 가로질러 블레드 섬에 도착. 우리를 맞이하는 많은 수의 계단. 99개의 계단이라는데 참 짓궂은 전설이 있다. 신랑이 신부를 안고 쉬지 않고 99개의 계단을 올라가 위에 있는 교회내 종을 치면 백년해로 한단다. 관광객들 중에 객기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우리 부부는 몸무게와 건강상태를 고려해 깊은 사랑의 배려로 함께 손을 다정히 잡고 계단에 올라 종을 치는 것으로 남은 백년해로를 예약하고 왔다.

다시 플레타나를 타고 섬을 나와 차를 타고 또 기대했던 그 곳, 블레드 성으로 향한다. ‘흑기사’라는 드라마를 통해 유명세를 타게 된 블레드 성은 1004년 독일 황제 헨리크 2세가 브릭센의 주교인 알부인 1세에게 이 지역의 땅을 선물해서 얼마 후 성이 지어졌으며 지금의 모습은 18C에 들어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1300m의 절벽위에 우뚝 서 그 웅장함을 드러내는 블레드 성은 슬로베니아서 가장 오래된 성답게 중세의 위엄을 드러낸다. 그 많은 누군가의 수고로 우리는 이리 멋진 절경을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돌길을 돌아 걸어 오르면 블레드 호수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이르게 된다.

이걸 보려고 한국에서부터 10시간이 날아왔구나. 오길 잘했다 싶다.

눈에 풍경을 원없이 담고 야외카페에서 차 한잔하며 이 귀하고 감사한 시간들을 음미한다. 화가로서 멋진 풍경을 화폭에 담는 것이 업이고 보람이고 성취이지만 자연인의 한 사람으로서 조물주의 작품을 눈과 마음에 담는 것은 그 이상의 감동과 기쁨이다.

물론 눈과 마음에 깊이 새기고 담아와 화폭에 옮겨 모두와 나누는 것은 조물주가 내게 맡겨준 귀하고 감사한 사명이다.

슬로베니아는 내게 급한 숨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마음으로 우리를 품는, 온유하지만 장엄한 자연의 맛을 만끽하게 하는 아름다운 한 장의 그림이 되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 김호삼프로필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개인전11회, 2인전 3회, 단체전 300여회 개최

-광주·전남 수채화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