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1000年 인물열전] <12> 장성 유학자 하서 김인후 (상)
2018년 05월 02일(수) 00:00 가가
서울엔 이이, 호남엔 김인후
장성 출신 유학자 하서 김인후는 조선시대 도학과 절의와 학문을 갖춘 대학자로 꼽힌다. 광주 중외공원에 있는 김인후 동상. <장성군 제공>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
장성을 이야기할 때 ‘문불여장성’을 떼놓고 말할 수 없다. “글과 학문이 장성만 못하다”라는 말은, 장성을 상징하는 대표적 수사이자 지역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말이다.
장성은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고장이다. 일설에 주위에 입암산성과 고창산성 같은 긴 성이 많아 ‘장성(長城·긴 성)’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지리적인 여건 탓에 조선시대에는 손꼽히는 유학자들이 유배를 오기도 했다. 또한 당대의 대표 유학자들이 학문을 논하고 교분을 나누는 고장으로 알려졌다. 필암서원(하서 김인후), 고산서원(노사 기정진), 봉암서원(망암 변이중)은 장성의 학문이 얼마나 깊고 선비 정신이 웅숭깊은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지난 2014년 장성 출신 문인들의 대표적인 작품과 활동을 집대성한 ‘장성문학대관’은 그러한 ‘문불여장성’을 보여주는 명징한 결과물이다. 책에는 150여 명의 작가와 500여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수록된 문인들의 다채로운 면모 가운데 ‘문불여장성’ 앞자리에는 하서(河西) 김인후(1510∼1560)가 놓여 있다.
그만큼 하서의 학덕이 크고 넓다는 의미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의 하서에 대한 평은 그의 인물 됨됨이 뿐 아니라 학문적 깊이를 말해준다.
‘우리나라의 많은 인물 중에서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비한 탁월한 이는 그다지 찾아볼 수 없는데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하서 선생을 종생하여 이 세 가지를 다 갖추게 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지역마다 뛰어난 유학자들이 있었다. 호남 북쪽에 이항, 남쪽 김인후, 영남 이황, 충청 조식, 서울에 이이가 있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이는 하서의 학문이 당대 호남과 조선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는지 보여준다.
김인후는 1510년 황룡면 맥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인근에 붓 모양을 닮은 영험한 바위가 있어 그 기운이 하서의 학문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물론 서원의 명칭을 ‘필암’으로 지은 이유이기도 하다. 서원과 붓은 학문을 상징하며 붓 바위는 이를 보증한다. 그것이 논리적 연관성이 있든 없든 붓 바위는 선비의 고장과 ‘문불여장성’ 이미지를 포섭한다.
그 때문인지 김인후의 위패가 배향된 필암서원(筆巖書院)에 갈 때면 고상한 학문과 문장에 절로 옷깃이 여며진다. 서원 앞에 서면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회귀해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고풍의 건물은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향기를 발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어, 오늘의 장성이 추진하는 ‘옐로우 시티’, 이른바 황색 이미지와도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언급한 대로 필암서원은 조선시대 선조 23년에 유학자 하서 김인후와 그의 사위인 고암 양자징(1529∼1593)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일반적으로 가깝고도 먼 사이가 장인과 사위의 관계인데 서원에 장인과 사위가 동시에 배향된 것은 자못 이례적이다. 그만큼 두 사람이 돈독하게 학문을 논하고 학풍을 진작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필암서원이 효종 때 사액서원으로 지정된 것은 그만큼 조정으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눈앞에 펼쳐진 누각(확연루·廓然樓)를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다. 송시열이 쓴 편액은 시원하면서도 활달하다. 고졸하면서도 고아한 정취가 배어나온다. 글자의 뜻 때문인지 들이치는 봄볕마저 밝고 시원하다. 혹여 이곳에 답답한 심사를 안고 들어온 이들이 있다면 저 글씨 앞에서 모든 게 눈 녹듯 사라질 것 같다.
“확연(廓然)은 ‘탁 트인’, ‘텅 빈 듯 아득히 넓은 상태’, ‘분별과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휑한 상태’를 말한다. 마음과 관련해서는 사욕이 없어 고요하고 매달린 데가 없는 경지다. 학인이 이치를 궁구하는 공부에 오래도록 힘쓰면 하루아침에 모든 이치가 툭 트이게 되어 뭇 사물의 겉과 속, 안과 밖, 정밀한 것과 거친 것이 나의 마음에 이르지 않음이 없게 된다. 이 또한 확연의 경지다.”(허균, ‘한국의 서원’, 다른 세상, 155쪽)
여기서 잠시 김인후의 삶을 들여다보자. 황룡면에서 태어난 그는 과거에 급제해 성균관에 입학한다. 이후 옥과 현감, 성균관 전서를 지내기도 한다.
김인후의 관직생활 중 가장 고독하고 괴로웠던 시기는 아마도 기묘사화와 을묘사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화의 광풍이 불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도학정치를 주창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던 조광조가 훈구파의 탄핵으로 죽임을 당하던 즈음이었다. 강직했던 하서는 당시 사림들의 명예를 위해 진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예로부터 선치(善治)를 하는 군수는 어진 인재를 가까이 하며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어진 인재를 가깝게 하면 임금을 도와 백성을 교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면 사람이 지킬 떳떳한 윤리가 밝혀져 세상을 두터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종은 하서의 상소를 수용하지 않는다. 김인후는 사직을 요청하고 옥과현감으로 가게 된다. 시절이 하수상하고 정쟁의 피비린내 나는 틈바구니에서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칩거’를 택했던 것이다.
아마도 하서의 삶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은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 설서로 인종을 가르치던 때가 아닌가 싶다. 인종은 스승인 김인후에게 묵죽도를 선물할 만큼 하서를 존경하고 아꼈다. 직접 묵죽도를 하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필암서원 내의 경장각은 인조가 하사했던 묵죽도를 보관하던 공간이다. 그러나 인종은 보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병사하고 만다.
벼슬을 그만 둔 김인후는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 정진과 후학 양성에 진력을 다한다. 김인후는 1600여 수의 시를 지었다. 저서로 ‘하서집’, ‘태극도설’, ‘서명사천도’ 등을 남겼는데 선비의 인품과 기상, 절개 등이 정치한 언어로 형상화돼 있다. 후일 정조는 “학문과 절의와 문장에 있어서 이를 다 갖춘 사람은 김인후 한 사람 뿐이다”며 그의 식견과 됨됨이를 칭송했다.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
장성을 이야기할 때 ‘문불여장성’을 떼놓고 말할 수 없다. “글과 학문이 장성만 못하다”라는 말은, 장성을 상징하는 대표적 수사이자 지역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말이다.
장성은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고장이다. 일설에 주위에 입암산성과 고창산성 같은 긴 성이 많아 ‘장성(長城·긴 성)’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지리적인 여건 탓에 조선시대에는 손꼽히는 유학자들이 유배를 오기도 했다. 또한 당대의 대표 유학자들이 학문을 논하고 교분을 나누는 고장으로 알려졌다. 필암서원(하서 김인후), 고산서원(노사 기정진), 봉암서원(망암 변이중)은 장성의 학문이 얼마나 깊고 선비 정신이 웅숭깊은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그만큼 하서의 학덕이 크고 넓다는 의미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의 하서에 대한 평은 그의 인물 됨됨이 뿐 아니라 학문적 깊이를 말해준다.
조선 중기에는 지역마다 뛰어난 유학자들이 있었다. 호남 북쪽에 이항, 남쪽 김인후, 영남 이황, 충청 조식, 서울에 이이가 있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이는 하서의 학문이 당대 호남과 조선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는지 보여준다.
그 때문인지 김인후의 위패가 배향된 필암서원(筆巖書院)에 갈 때면 고상한 학문과 문장에 절로 옷깃이 여며진다. 서원 앞에 서면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회귀해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고풍의 건물은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향기를 발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어, 오늘의 장성이 추진하는 ‘옐로우 시티’, 이른바 황색 이미지와도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언급한 대로 필암서원은 조선시대 선조 23년에 유학자 하서 김인후와 그의 사위인 고암 양자징(1529∼1593)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일반적으로 가깝고도 먼 사이가 장인과 사위의 관계인데 서원에 장인과 사위가 동시에 배향된 것은 자못 이례적이다. 그만큼 두 사람이 돈독하게 학문을 논하고 학풍을 진작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필암서원이 효종 때 사액서원으로 지정된 것은 그만큼 조정으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눈앞에 펼쳐진 누각(확연루·廓然樓)를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다. 송시열이 쓴 편액은 시원하면서도 활달하다. 고졸하면서도 고아한 정취가 배어나온다. 글자의 뜻 때문인지 들이치는 봄볕마저 밝고 시원하다. 혹여 이곳에 답답한 심사를 안고 들어온 이들이 있다면 저 글씨 앞에서 모든 게 눈 녹듯 사라질 것 같다.
“확연(廓然)은 ‘탁 트인’, ‘텅 빈 듯 아득히 넓은 상태’, ‘분별과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휑한 상태’를 말한다. 마음과 관련해서는 사욕이 없어 고요하고 매달린 데가 없는 경지다. 학인이 이치를 궁구하는 공부에 오래도록 힘쓰면 하루아침에 모든 이치가 툭 트이게 되어 뭇 사물의 겉과 속, 안과 밖, 정밀한 것과 거친 것이 나의 마음에 이르지 않음이 없게 된다. 이 또한 확연의 경지다.”(허균, ‘한국의 서원’, 다른 세상, 155쪽)
여기서 잠시 김인후의 삶을 들여다보자. 황룡면에서 태어난 그는 과거에 급제해 성균관에 입학한다. 이후 옥과 현감, 성균관 전서를 지내기도 한다.
김인후의 관직생활 중 가장 고독하고 괴로웠던 시기는 아마도 기묘사화와 을묘사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화의 광풍이 불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도학정치를 주창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던 조광조가 훈구파의 탄핵으로 죽임을 당하던 즈음이었다. 강직했던 하서는 당시 사림들의 명예를 위해 진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예로부터 선치(善治)를 하는 군수는 어진 인재를 가까이 하며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어진 인재를 가깝게 하면 임금을 도와 백성을 교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면 사람이 지킬 떳떳한 윤리가 밝혀져 세상을 두터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종은 하서의 상소를 수용하지 않는다. 김인후는 사직을 요청하고 옥과현감으로 가게 된다. 시절이 하수상하고 정쟁의 피비린내 나는 틈바구니에서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칩거’를 택했던 것이다.
아마도 하서의 삶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은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 설서로 인종을 가르치던 때가 아닌가 싶다. 인종은 스승인 김인후에게 묵죽도를 선물할 만큼 하서를 존경하고 아꼈다. 직접 묵죽도를 하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필암서원 내의 경장각은 인조가 하사했던 묵죽도를 보관하던 공간이다. 그러나 인종은 보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병사하고 만다.
벼슬을 그만 둔 김인후는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 정진과 후학 양성에 진력을 다한다. 김인후는 1600여 수의 시를 지었다. 저서로 ‘하서집’, ‘태극도설’, ‘서명사천도’ 등을 남겼는데 선비의 인품과 기상, 절개 등이 정치한 언어로 형상화돼 있다. 후일 정조는 “학문과 절의와 문장에 있어서 이를 다 갖춘 사람은 김인후 한 사람 뿐이다”며 그의 식견과 됨됨이를 칭송했다.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