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비가 엄청 나게 쏟아졌어. 한 일 주일 동안 머무른 것 같은데 그중 절반 이상? 아니 거의 비가 왔다고 생각하면 돼. 마치 세상을 옆으로 돌려놓은 듯 세찬비가 거의 90도로 내리는거 있지. 첫 외국 여행이었었는데…. 그때만 해도 “내가 하는 건 다 왜이러나”하고 생각했어. 벌써 거의 10년이 지났네….” 라고 나는 새로 사귄 친구에게 말했어. 그래 그러고 보니 벌써 10년 전이구나.

나는 지금 전시를 위해 대만에 와 있어. 엊그제 다녀온 줄 알았던 이곳의 기억이 벌써 10년 전이라니. 시간이 빨라진 건지, 누구 말대로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져서 시간이 빠르게 간다고 느껴지는 건지 여튼 무섭군.

10년 전 부푼 마음을 안고 도착한, 생애 첫 외국여행지인 이곳의 인상은 완전 꽝이었지. 그땐 하지도 못하는 외국어를 써야 한다는 생각에 몇 분 후 치러야 할 시험 준비 하듯 생각나는 단어들을 내내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며 긴장했어. 반면에 눈에 보이는 평소와 다른 모습들은 유명한 명소도 아닌데 하나하나 눈에 담기더라고. 그냥 단순히 차를 타고 목적지로 이동하는 길인데도 말이야.

동양적인 감성과 서구적인 세련됨이 혼재된 도시를 달리는 노란색의 일본 브랜드 택시, 녹색빛 형광등으로 만들어진 야자수 모양이 장식물, 차보다 많은듯한 스쿠터 무리들, 난생 처음 맡아 본 고수의 냄새, 말의 성조로 인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소리들의 생소함에 나는 마치 호기심 많은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어. 어린애라면 어린애지….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고 그곳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 말이야. 오히려 덩치에 비하면 어린애보다 못할라나.

그렇게 무지의 상태로 국립타이페이예술대학이 주최한 ‘타이페이 드리프트’에 참여했지. 프로그램 제목대로 비오는 타이페이를 미끄러져 다녔어. 아니, 생각해 보면 나를 데려오신 교수님 뒤를 졸졸 따라다닌 거지. 몇 마디씩 던지는 교수님의 외국어 실력에 감탄해하며 잘 정돈되고 준비된 예술대학의 시설물과 실기실을 둘러봤어. 또 이곳의 명소인 중정기념당, 랜드마크인 101빌딩, 그리고 영화 ‘말 할 수 없는 비밀’ 배경지인 단수이까지 흥미로운 공간들을 방문했어. 잘 짜여진 코스와 더불어 더운 지방의 특징인 열대 과일과 샤브샤브 등을 만끽했어. 궂은 날씨는 이어졌지만 어느새 대만의 매력에 빠져 날씨 따윈 뒷전이 되었지.

마지막 일정인 2008타이페이 비엔날레 오픈식에 갔어. 넓은 광장, 화려한 조명, 개성이 묻어나는 멋진 옷차림의 사람들, 알아먹지 못하지만 각국의 언어가 버무려진 수다, 그리고 당시 이곳을 알기 전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수준 높은 현대미술 작품들 사이를 거닐며 사진을 찍어댔지.

생각했어. 언제쯤 나는 이런 전시장에서 전시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유창하진 않지만 다른 나라 말로 작가들과 웃으며 어울릴 수 있을까. 대만의 첫 인상 만큼 막막하고 변덕스러운 심리의 변화들이 오갔던 그 시절. 나와 다른 멋진 장면들을 체감하며 잠시나마 꿈을 꾸었지. 그래, 꼭 이런 상황이 내게 오지 않더라도 여행이라도 꼭 한번 와봐야지 라고.

이런, 말하다 보니 너무 과거 이야기가 길었네. 아무튼, 사람은 꿈은 크게 꿔야 한다잖아? 누군가 예전에 그러더라고. 큰 꿈을 꾸면 그 꿈까지는 못 닿더라도 가까이 갈 수 있다고. 그때 잠시나마 꿈꿔서인지 광주, 대만 교류전인 ‘ARENA’ 전시 참가를 위해 다시 올수 있게 되었네. 근데 말야 더 신기한 건 전시장에 와서 보니 뭔가 익숙한 게 낯설지 않더라고? 설마 설마 했는데 아까 말했던 10년전 비엔날레가 열렸던 장소인 거 있지. 그 장소가 이곳 타이페이시립미술관 이더라구.

순간 예전 경험들이 겹치면서 여러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갔어. 대만의 경험에 중화권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그래서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운영하는 북경창작스튜디오를 지원하게 되었고, 그걸 계기로 중국어를 배우게 되고, 어느새 다시 이 자리에 와 있네. 그러고 보니 짧다고 느꼈던 10년 동안 나름 여러 일들이 있었네.

이 곳을 통해 돌아본 과거의 시간 덕에 갑자기 10년 뒤가 궁금해지네. 10년 뒤엔 어디서 또 무엇을 하고 있을까? 또 어떤 많은 이야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한밤 단수이 공원의 바람이 유독 경쾌하게 느껴지는 군. 예전 그때 날씨와는 다르게.



이인성

-조선대학교 미술대학및 동대학원 졸업

-광주신세계 미술제 대상

-광주 미테 우그로 단기입주작가

-일본 코가네쵸바잘 레지던시

-광주 시립미술관 북경 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

-광주 시립미술관 양산동 창작스튜디오입주작가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출강

-개인전 ‘Histopia’, 갤러리리채, 광주 외 6회

(한국, 중국, 태국)